11. 칭기스칸 보드카의 밤

by 윤기환

하늘이 진한 핏 빛으로 물들고 있다. 지친 몸을 끌고 식당에 모였다. 저녁 메뉴는 양푼에 푸짐하게 담겨 온 허르헉이다. 이제는 아는 맛이라 더욱 식욕을 자극한다. 빈 속에 칭기스칸 보드카 한 잔 들이켜니 속이 후끈 달아오른다. 큼직한 갈비를 뜯으며 연거푸 서너 잔 더 들이켰다. 꽤나 독한 술임에도 목 넘김이 부드럽고 끝 맛도 깔끔하다. 소주가 김치와 삼겹살에 찰떡궁합이듯이, 칭기스칸 보드카와 허르헉은 궁합이 참 잘 맞는다. 밀과 보리를 원료로 하여 증류한 뒤, 몽골의 전통 허브와 과일을 첨가하여 만든다는 칭기스칸 보드카는 우리의 소주와 같이 몽골을 대표하는 술이다.


술자리가 길어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모두들 술잔 오가는 속도가 느리다. 나 또한 빗 길에 지친 탓인지 오늘은 술이 덜 당긴다. 숙소에서 한 잔 더하기로 하고, 식당에서 보드카 두 병과 맥주 몇 캔을 챙겼다. 고맙게도 주방장이 안주로 허르헉과 김치를 챙겨준다.


다시 내 방에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칠순을 넘긴 열이 형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넷이서 둘러앉았다. 한 잔 두 잔 돌리다 보니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한다. 특히, 웬만하면 술을 저어하던 歲 아우의 잔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물 붓 듯 술을 들이켠다. 내일이 살짝 걱정되었지만, 그 행복을 깨고 싶지 않다.


어느새 보드카와 맥주가 동이 났다. 춘이 아우가 식당에 가더니 보드카 두 병을 또 가져왔다. 흥건히 젖은 술자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했던 국토종주 이야기를 시작으로 또다시 떠날 해외 라이딩 얘기로 이어지면서 술이 술을 부르고, 흥이 흥을 부른다. 칭기스칸 보드카 향과 우리의 우정이 질펀하게 어우러져 돌아간다.


국토종주 때도 이런 밤이 적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함께 하는 시간과 인연이 좋아서 밤이 깊도록 흥에 취하곤 했다. 그럴 때면 술은 더 이상 술이 아니었다. 정(情)이었다. 오늘 우리는 먼 이국 땅 몽골 초원에서 또다시 정에 취하고 있다.


보드카 두 병이 다시 동이 나기까지 "열혈청춘만세 파이팅"을 수십 번쯤 외친 후에야 밤늦은 술자리가 마무리되었다. 각자 방으로 돌아가고, 방안엔 술 병과 맥주 캔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보드카향과 김치냄새가 뒤범벅된 쾌쾌한 기운이 방안에 진하게 흩어져 있다. 창을 여니 서늘한 어둠이 훅하니 스민다. 쌉쌀한 바람이 술기운에 달아오른 몸을 감싼다.


사위는 적막하고,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칭기스칸 보드카와 함께 한 밤, 열혈청춘의 정이 별빛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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