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정리의 미스터리

기능적 공간 vs. 정서적 공간

by 책밤

둘의 이야기


그의 집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했다. 거실 한쪽 벽에는 세 식구가 모여 앉을 수 있는 널찍한 소파가 있었고, 맞은 편에는 대형 텔레비전이 걸려 있었다. 그에게 이 공간은 완벽하게 기능했다. TV를 보는 데 아무런 방해도 없었고, 리모컨은 늘 정해진 서랍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 공간은 항상 2% 부족했다. 그녀의 눈에는 소파 팔걸이에 무심하게 걸쳐진 안경 케이스, 공기청정기 뒷면으로 살짝 빠져나온 전선 다발, 그리고 책꽂이에 각이 맞지 않는 채 꽂혀 있는 몇 권의 책이 들어왔다. 그의 시야에 ‘걸리는’ 것은 없었지만, 그녀의 시야에는 ‘거슬리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그는 소파에 누워 낮잠을 청하려 했고, 그녀는 주방 식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거실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거실 정리 좀 해줄 수 있어? 특히 저 전선이랑 테이블 위.”
그는 마지못해 일어섰다. 탁자 위에는 딸아이의 수학 문제집과 사용 중이던 테블릿, 그리고 충전 중인 휴대폰이 있었다. 그는 테블릿을 덮어 책상으로 가져갔고, 문제집을 딸아이 방으로 옮겼다. 충전 중이던 휴대폰은 잠시 소파 옆에 두었다. 단 5분 만에 끝난 일이었다. “다 했어. 깨끗해졌지?” 그는 다시 소파에 누우려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정리했다는 공간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그가 전혀 둘러보지 않은 소파와 벽 사이의 먼지 더미와 제멋대로 엉켜있는 충전 케이블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눈치를 보며 답답함에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의 이야기

“나는 거실에 들어섰을 때, 숨이 막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내게 '정리'는 물건을 숨기는 행위가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다.
남편은 ‘청소’와 ‘정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청소가 표면적인 먼지를 닦아내는 행위라면, 정리는 공간에 감정을 더하는 일이다. 남편은 분명 테이블 위 물건을 치웠지만, 그가 치운 자리에는 항상 그 물건들의 ‘흔적’이 남는다. 가령 서랍안에 정리해 넣었다는 충전 케이블은 늘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그건 숨겨진 혼란이고, 나는 그 혼란이 서랍 뒤편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답답함을 느낀다.
그가 "깨끗해졌지?"라고 물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의 결과물만 제거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어지럽게 뒤엉킨 전선은 ‘당장이라도 불이 날 것 같은’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을 주며, 소파 밑에 쌓인 머리카락은 ‘이 공간을 방치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부분들이 쌓여서 결국 '이곳은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이른다.
딸아이는 이 미묘한 감정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딸은 방이 어질러져 있어도 놀 때는 불평하지 않지만, 학습지를 풀거나 독서를 할 땐 책상을 정리하고 인형을 선반에 올려두는 등 자신만의 ‘정리 의식’을 치른다. 그건 효율성을 위한 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져야 비로소 공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게 정리는 '삶을 통제하고 있다'라는 안도감을 주는 행위이다. 그것이 남편의 눈에는 기능적으로 완벽한 공간이, 내 눈에는 '정서적으로 어수선한' 공간이 되는 근본적인 이유인 것이다.


그의 이야기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나에게 '정리'란 간단한 알고리즘이다.

• 입력 (Input): 그녀의 요구사항 ("거실 정리 좀 해줘.").
• 처리 (Process): A 지점에 있어야 할 물건이 B 지점에 있으면, A 지점으로 옮긴다. 혹은 눈에 띄는 곳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곳, 예로 서랍 등으로 옮긴다.
• 출력 (Output): 눈에 거슬리는 물건이 없고, 공간의 쓰임에 문제가 없으면 정리 완료.

나는 5분 만에 '정리 임무'를 완수했다. 테블릿은 책상으로, 문제집은 방으로. 깔끔했다. 그런데 그녀는 왜 한숨을 쉬는 걸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정확히 뭐가 문제야? 내가 충전 케이블을 서랍에 넣었잖아.” 그녀는 대답했다. “맞아, 보이지 않는 그 케이블은 여전히 서랍 안에 엉켜 있지.”
이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불편할 수 있지? 기능적으로 문제없는 상태가 왜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되는 걸까? 내 사고방식에서 물건은 그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케이블은 전기를 전달하는 기능, 책은 정보를 담는 기능. 그것들이 자기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곧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나에게 집이란 기계와 같다. 잘 정비되어 작동하기만 하면 된다. 그녀에게 집이란 정원과 같다. 끊임없이 돌봐야 하고, 아름답게 가꿔야 하며, 분위기를 관리해야 한다. 나는 왜 그녀가 굳이 휴지통 안의 쓰레기 봉투를 꽉꽉 채우지 않고 자주 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봉투가 가득 차서 넘치지 않으면 기능적으로 문제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가득 찬 봉투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찝찝함’을 참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느낌'이라는 모호한 정서를 충족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상황이 매번 불만스럽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기능적으로 완벽한 나의 정리는 왜 그녀에게는 항상 '실패'로 여겨지는 걸까?


남자의 깨달음


나는 수년 동안 '정리'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라봤다. 그녀가 불만을 토로하면, 나는 그 불만을 낳은 물건을 옮김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물건을 치워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리를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되찾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의 세계는 '기능의 세계'다. 이 컵은 물을 담는 기능, 이 의자는 앉는 기능에 충실하면 된다. 물건이 제 기능을 하면 '정상'으로 판단한다.
아내와 딸의 세계는 '관계와 정서의 세계'였다. 물건은 단순한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닌,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정서를 자극한다. 삐뚤어진 액자는 '무심함'이라는 메시지를, 엉킨 전선은 '혼란'이라는 메시지를 공간에 퍼뜨린다. 그녀가 원하는 정리는 바로 이런 부정적 메시지를 공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행위였던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더이상 그녀에게 "무엇을 치워야 할까?"라고 묻지 않아야한다는 사실을. 대신 '이 공간이 지금 그녀에게 어떤 느낌을 주고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때때로 나는, 그녀가 집이라는 공간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비효율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서랍 안의 케이블까지 말끔하게 묶어주는 그 사소한 수고가, 그녀에게는 이 공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정리라는 것을 아는 이유에서다. 그렇게 아내와 딸, 이 두 여자의 세계에서 공존하기 위해 배워야 할 또하나의 교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