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키드》, 혹은
극장 불이 꺼지고 〈Defying Gravity〉가 울려 퍼진다. 엘파바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진심으로 감동받았다. 우리 모두 엘파바를 응원했다.
영화가 끝나고, 지난번 지하철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한 승객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젊은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큰 소리로 따졌다.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랬다. 그 남성이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며 내릴 때까지,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나는 그가 장애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글린다였다.
1. 겨울, 우리에게 《위키드》가 도착한 방식
《위키드》가 한국에서 개봉한 2024년 11월은 묘한 시기였다.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지나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책임 공방이 계속되었고, 의대 증원을 둘러싼 갈등이 의료 현장을 마비시켰으며, 부동산 가격은 치솟고 청년 실업률은 역대 최고를 경신했다. 그런데 극장가는 《위키드》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초록색 마녀의 이야기를 보기 위해 기꺼이 2시간 40분을 극장에 앉아 있었다.
왜일까? 단순히 뮤지컬 원작의 팬덤 때문일까? 화려한 CG와 스타 배우들의 열연 때문일까?
아니다. 우리는 엘파바가 필요했다. 시스템에 맞서는 누군가,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는 누군가, 모두가 외면할 때 혼자서라도 날아오르는 누군가.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람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것도 안전한 곳에 앉아서.
2. 초록색 피부, 혹은 가시화된 차이가 작동하는 방식
엘파바는 태어날 때부터 초록색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존재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오즈 사회에서 초록색은 에메랄드 시티의 건물에나 어울리는 색이지, 사람의 피부색이어서는 안 되는 색이었다.
이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가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에서 말했듯, 어떤 신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정상"으로 표시되며, 이 표시는 그 신체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작동한다.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는 바로 이 "가시화된 차이"의 알레고리다.
엘파바가 쉬즈 대학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의 반응을 보자. 그들은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수군거리고, 눈을 피하고, 거리를 둔다. 이것이 2020년대식 차별의 방식이다. 우리는 더 이상 "너는 다르니까 나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적으로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라고 말한다.
글린다가 엘파바와 같은 방을 쓰게 됐을 때, 그녀는 즉각 항의한다. 하지만 그녀의 항의는 "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이라는 전제 아래 이루어진다. 이건 내 문제가 아니야. 원래 1인실을 신청했는걸. 글린다는 진심으로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지점이다.
3. 오즈더스트 댄스 파티, 혹은 모욕을 선물처럼 포장하는 기술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댄스 파티 신이다. 학생들은 엘파바에게 검은 뾰족 모자를 선물한다. "특별한 선물"이라고 말하면서. 엘파바는 기뻐하며 모자를 쓴다. 그리고 댄스 플로어에 나선다. 그제야 그녀는 깨닫는다. 모두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구별 짓기』에서 "상징폭력"의 개념을 제시한다. 상징폭력은 물리적 폭력과 달리 피해자가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선의", "배려", "호의"로 위장된다. 뾰족 모자는 "특별한 선물"이었고, "친절"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너는 정상이 아니야"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더 교묘한 것은, 이 폭력의 가해자들이 자신을 가해자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뾰족 모자를 선물한 학생들은 장난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의는 진짜였을 수도 있다. 이것이 상징폭력의 핵심이다.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흐려지고, 폭력은 일상의 언어로 번역된다.
그런데 글린다는 다르다. 그녀는 엘파바가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댄스 플로어로 나간다. 그리고 엘파바와 함께 춤을 춘다. 이 순간 관객은 감동한다. "글린다는 착한 사람이야. 그녀는 엘파바 편이야."
정말 그런가? 글린다의 행동을 다시 보자. 그녀는 파티 자체를 멈추지 않는다. 뾰족 모자를 선물한 학생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엘파바와 춤을 춤으로써, 상황을 "해결"한다. 이제 모두가 함께 춤추고, 분위기는 훈훈해지고, 엘파바는 미소 짓는다. 그리고 구조는 그대로다.
이것이 2020년대 한국 사회가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는 건물을 규탄하는 대신, 휠체어를 들어주는 "훈훈한 미담"을 생산한다.
4. 에메랄드 시티의 마법사, 혹은 사기꾼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작동 방식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엘파바와 글린다는 에메랄드 시티에 도착한다. 거대한 마법사의 얼굴이 홀을 압도한다.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커튼 뒤에는 늙고 초라한 사기꾼이 레버를 당기고 있다.
많은 관객이 이 장면에서 "권력의 실체"가 폭로된다고 생각한다. 마법사는 가짜였고, 모든 것은 연출이었다. 그런데 이 독해는 한 가지를 놓친다. 마법사 개인이 사라진다고 해서 시스템이 무너지는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이 더 이상 왕이나 독재자 같은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대의 권력은 분산되고, 제도화되며, 자동화된다. 마법사는 한 사람이지만, 그가 운영하는 시스템은 에메랄드 시티 전체에 퍼져 있다. 경비병들, 관료들, 시민들, 그리고 엘파바와 글린다까지. 모두가 이 시스템의 일부다.
엘파바는 동물들이 고문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그녀는 마법사에게 항의한다. "이건 잘못됐어요!" 그런데 마법사의 대답을 보자. 그는 사악한 악당처럼 웃지 않는다. 오히려 피곤한 표정으로 말한다. "넌 아직 어려서 이해 못 하는구나. 오즈를 지키려면 희생이 필요해."
이 대사가 섬뜩한 이유는, 마법사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오즈를 지키려 한다. 그에게 동물들의 희생은 "필요악"이다. 더 큰 선을 위한 불가피한 대가다. 이것이 시스템의 논리다. 시스템은 악의가 없다. 오히려 선의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선의가 폭력을 정당화한다. 2020년대의 한국을 보자. 이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어쩌면 그들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진심이 더 무섭다.
마법사가 엘파바에게 그리모어를 읽게 하는 장면을 보자. 그는 엘파바의 힘을 이용해 날개 달린 원숭이들을 만들려 한다. 이 생명체들은 비밀경찰로 기능할 것이다. 감시하고, 억압하고, 통제할 것이다. 그런데 마법사는 이를 "오즈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부른다.
엘파바가 주문을 읽는 순간, 원숭이 한 마리의 등에서 뼈가 튀어나온다. 피부가 찢어진다. 원숭이는 비명을 지른다. 엘파바는 경악하며 주문을 멈추려 하지만, 이미 시작된 마법은 되돌릴 수 없다.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스템에 일단 참여하면, 당신은 통제력을 잃는다. 엘파바는 동물들을 돕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힘은 동물들을 고문하는 도구가 되었다. 선의는 시스템 안에서 왜곡된다.
엘파바가 탈출을 선택하는 순간, 시스템은 즉각 반응한다.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은 새로운 서사를 생산한다. "사악한 마녀", "오즈를 위협하는 존재", "위험한 테러리스트". 이 서사는 놀라운 속도로 확산된다. 엘파바가 탈출한 지 몇 분도 안 돼, 에메랄드 시티 전체가 이미 알고 있다.
5. 글린다의 손, 혹은 놓아버리는 순간의 정치학
〈Defying Gravity〉의 절정. 엘파바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르며 글린다에게 손을 내민다. "나와 함께 가자." 글린다의 손이 엘파바를 향해 움직인다. 관객은 숨을 죽인다. 글린다는 엘파바의 손을 잡을 것인가?
글린다의 손이 멈춘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온다. 엘파바는 홀로 하늘로 날아오른다.
많은 관객이 이 순간 글린다를 비난한다. "비겁해", "특권을 포기 못 해", "진정한 우정이 아니야". 그런데 이 비난은 너무 쉽다. 글린다가 그 순간 느낀 것을 우리는 정말 모르는가?
글린다에게 날아오른다는 것은 단순히 빗자루를 타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 전체와 결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 친구, 사회적 지위, 안전한 미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템이 생산한 서사 안에서, 엘파바와 함께 날아오르는 사람은 공범이 된다.
작년 겨울,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집회에서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고, 한 참가자가 부상을 입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꺼내 영상을 찍어야 할까? 앞으로 나가 항의해야 할까?
글린다는 선한 사람이다. 영화는 이를 계속 보여준다. 그녀는 엘파바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두 사람의 우정은 진짜다. 그러나 우정도, 선의도, 이해도 시스템을 이기지 못한다.
글린다가 지상에 남고,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녀는 울고 있다. 이 눈물이 가짜인가? 아니다. 글린다는 진심으로 슬프다. 그리고 바로 이 진심 어린 슬픔이, 이 선의가, 시스템을 유지한다. 시스템은 우리에게 나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사람으로 남으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삭임을 따른다.
6. 'TO BE CONTINUED', 혹은 서사가 유예를 생산하는 방식
엘파바의 망토가 바람에 펄럭인다. 〈Defying Gravity〉가 절정에 달한다. 하늘은 붉고, 구름은 희다. 엘파바는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화면이 암전 된다. 'TO BE CONTINUED'
이 엔딩은 서사적 필연이 아니다. 《위키드》는 원작 뮤지컬 1막의 결말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 선택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극장의 관객은 '다음 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대기 시간 동안, 엘파바의 저항은 하늘에 매달린 채 정지한다.
'TO BE CONTINUED'는 카타르시스를 유예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저항의 절정을 보여주지만, 그 결말은 보류한다. 엘파바가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다. 그녀는 단지 날아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이 '날아오름'은 속편이 개봉할 때까지 공중에 붕 떠 있다.
이 서사 전략이 교묘한 이유는, 관객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첫째, 저항의 감동. 엘파바는 시스템에 맞섰고, 관객은 그 순간에 열광한다. 둘째, 행동의 면제. 영화는 끝나지 않았으므로, 관객은 아직 최종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 "엘파바가 옳았는지는 2부, 3부를 봐야 알겠지." 이 유예는 편안하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가 "충격"을 연속적으로 배치해 관객의 사유를 마비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키드》의 전략은 정반대다. 영화는 충격을 주지 않는다. 대신 유예를 준다. 엘파바의 비행은 장엄하지만 미완이고, 글린다의 선택은 비겁하지만 유보적이다. 관객은 어느 쪽도 완전히 부정하거나 긍정할 수 없다. 그저 속편을 기다릴 뿐이다.
이 대기는 《위키드》의 상품 전략이기도 하다. 영화는 2부작으로 기획되었고, 1부는 2부를 위한 마케팅 장치로 기능한다. 'TO BE CONTINUED'는 관객을 포획한다. 당신은 이미 감정적으로 투자했으므로, 다시 극장에 올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엘파바의 저항은 상품 카탈로그 안에서 순환한다. 넷플릭스 재생 목록에서, 유튜브 리액션 영상에서, OST 스트리밍 차트에서.
그런데 이 상품화가 저항의 의미를 소거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문제는, 저항이 상품으로 유통되는 과정에서 그 정치성이 '감상'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Defying Gravity〉는 저항의 노래인 동시에 감동의 노래다. 사람들은 이 곡을 들으며 운다. 그러나 그 눈물이 행동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다. 눈물은 극장 안에서 소진된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글린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녀는 울고 있다. 이 클로즈업은 관객의 감정을 대리한다. 우리는 글린다처럼 슬프고, 글린다처럼 무력하다. 그리고 영화는 이 무력감을 긍정한다. "괜찮아. 네가 날아오르지 못한 것은 당연해. 다음 편을 기다리자."
'TO BE CONTINUED'는 이렇게 관객을 위로한다. 당신의 무행동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아직 때가 아닐 뿐이다. 엘파바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듯, 당신의 결단도 유예될 수 있다. 언젠가, 2부에서, 혹은 2부가 끝난 뒤에, 당신은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블록버스터 영화가 저항을 다루는 방식이다. 저항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엄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그 저항을 미완의 서사로 봉인함으로써, 관객의 행동을 무기한 연기시킨다. 영화는 끝나지 않았고, 따라서 당신도 아직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 극장을 나서며, 관객은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감동적이었어. 2부가 기대돼."
7. 나가며: 서사의 완결과 행동의 시작 사이
극장 불이 켜진다. 사람들이 일어선다. 누군가는 〈Defying Gravity〉를 흥얼거리고, 누군가는 눈물을 닦는다. 그들은 출구로 향한다. 엘파바는 여전히 하늘에 있고, 글린다는 여전히 지상에 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위키드》가 제기한 질문은 명확하다. 시스템에 맞서는 사람과 시스템 안에 남는 사람, 당신은 누구인가?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TO BE CONTINUED'는 답을 1년 뒤로 미룬다. 그리고 이 미룸은, 앞서 분석했듯, 영화의 상업적 전략인 동시에 서사적 전략이다.
그런데 관객은 이 유예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유예를 수용한다. "2부나 3부에서 답이 나오겠지. 지금은 모르겠어." 이 경우 관객은 영화의 리듬에 순응한다. 영화가 완결을 유예했으므로, 관객의 판단도 유예된다. 이것이 다수의 반응이다.
둘째, 유예를 거부한다. "영화는 끝나지 않았지만, 질문은 이미 제기됐어. 나는 지금 답해야 해." 이 경우 관객은 서사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영화는 'TO BE CONTINUED'라고 말하지만, 관객은 'TO BE ANSWERED NOW'라고 응답한다.
평론의 역할은 바로 이 두 번째 경로를 여는 것이다. 《위키드》는 서사를 유예했지만, 그 서사가 제기한 정치적 질문은 유예될 수 없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선택은 영화 속 2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 선택은 한국에서, 극장을 나선 관객의 일상에서, 지금 이루어진다.
이 글이 분석한 것은 《위키드》가 관객을 글린다의 위치에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초록색 피부의 가시화된 차이, 뾰족 모자의 상징폭력, 마법사의 시스템적 권력, 손을 놓는 순간의 합리화, 그리고 'TO BE CONTINUED'의 유예 전략. 이 모든 장치는 관객에게 말한다. "당신이 글린다인 것은 자연스럽다.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움이야말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다. 《위키드》는 글린다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선의, 그녀의 망설임, 그녀의 눈물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영화는 관객이 글린다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심지어 동일시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공감의 구조가 바로 시스템 유지의 메커니즘이다.
평론은 이 메커니즘을 해부했다. 그러나 해부가 곧 처방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 글은 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론은 작품이 무엇을 하는지 밝힐 뿐, 관객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시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위키드》를 보고 감동받았다면, 그 감동이 어디서 왔는지 질문해야 한다. 엘파바의 비행에 열광했다면, 왜 글린다의 침묵에도 공감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영화가 제공한 카타르시스가 실제 행동을 대체하지 않도록, 스펙터클이 사유를 마비시키지 않도록, 관객은 영화와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엘파바는 스크린 안에 남는다. 그러나 엘파바와 글린다 사이의 선택은 스크린 밖으로 나온다. 지하철 안에서, 회사에서, 뉴스를 볼 때, 우리는 매일 그 선택을 요구받는다. 《위키드》는 그 선택의 무게를 보여주었다. 이제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TO BE CONTINUED'는 영화의 서사다. 그러나 'TO BE DECIDED'는 관객의 현실이다.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삶은 유예되지 않는다. 2025년 겨울, 극장 밖의 세계에서, 선택은 지금 이루어진다. 엘파바로 날아오를 것인가, 글린다로 남을 것인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답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