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사슴 Oct 24. 2024

타인의 가슴속에서 죽으면 죽는다.

나와 너에 대해


 누군가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는 늘 여러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이해관념이 어떤 방식으로 다시 편협하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는 상대적인 위치에서밖에 관측되지 않고, 결국 나와 전혀 다른 누군가와 어울리지 않는 한 제한된 관계 속에서의 나는 거미줄을 만들고 그 안에 갇혀버린 거미와 다를 게 없을 테다. 그러나 나와 다른 이와, 그것도 전혀 다른 사람과 어울린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손절에 대해 후한 인심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시대인 요즘에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가두기 쉽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멍청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겠지. 그러나 단언컨대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멍청한 사람이다. 글쎄요 내지 침묵하는 게 내가 선택하는 가장 이상적인 답이기도 하며, 그럼에도 생각을 내비침을 요구받을 때면 그리 자신만만하거나 당당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다. 내가 옳다고 당당하게 여기기엔 여전히 스스로를 잘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모르겠는 순간의 연속이 차곡차곡 쌓여 두께감 있는 층위를 생성하면 히뿌연 구름처럼 무게감을 잃는다. 내 옆의 사람이 바보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이 내가 바보라는 명백한 이유가 된다.


 문득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사뭇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이유 없는, 그저 공기의 떨림에서 들려온 가락소리였으므로 누군가의 간절한 '끌어들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당신들에게 연락한다. 당신들과 날짜를 잡는다. 그대들과 만나서 이야기한다. 어렵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결국 이도 '너'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지 않는가. '사슴'과 '여우'는 3자의 입장에서 풀이된 객관적 주체다. 이 관점에서 '나'와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상호작용으로 관측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너'라는 2인칭 주체는 '나'라는 1인칭 주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나의 입장에서 친구에게 너라고 부르면 '너'는 그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반면 그냥 종이에 너는 학교에 간다'라고 적어 놓으면 '너'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텅 빈 무언가다. 누가 학교에 간다는 건지 우리는 결코 알 길이 없다. 너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 실재할 수 있는, 나에 의한 미약한 생명체... 내가 없이 '너'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물론 너는 내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그대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때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삼인칭 세계 속의 너다. 나의 친구로서, 내가 아는 그 사람으로서, 내가 부르는 '너'로서의 너는 오로지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사라지면 '너' 또한 사라진다. 3인칭의 세계로 말해질 수 없다는 건 객관성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직 주관성, 즉 관계와 상호작용으로만 설명될 수 있으며 나의 경험으로만 설명 가능하므로 함께 관계를 맺는 바로 그순간 매번 새롭게 창조된다.


 함께 찍은 사진이 비로소 가슴에 와닿을 수 있는 것은 반사되는 빛의 입자 속에서 '너'의 흔적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사진은 그저 특정한 패턴의 빛을 반사하는 물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 안에서 '너'를 발견하면서 마음이 움직인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진은 단순히 삼인칭의 패턴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 사진은 '나'와 '너'의 관계 안에 놓여 있다. '너'의 사진은 객관적인 빛의 패턴과 달리 나의 눈에 다가와 대답한다. 내가 그 사진에 사랑을 보내면 그 사진은 나에게 사랑을 되돌려준다.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제는 누군가가 기억해주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마음 속에서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는 제제의 가르침과도 이어진다.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마음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_<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제제




 제제의 말이 맞다. 사람은 꼭 총을 맞아 죽는 게 아니다.

사람은 사랑을 멈추면 죽는다.


 제제의 말이 맞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으로 사는 게 아니다.

타인의 가슴속에서 죽으면 죽는다.


 우리는 뜨겁게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맹렬하고 숭고한 어떤 가치를 쫓는다.

그 이유가 뒤따라오는 타인의 선망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경이라 한다면

이건 닭이냐 달걀이냐처럼 뒤집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선망과 사랑을 받기 위해 뜨겁고 맹렬하게 가치를 쫓으며 살아가는 게 분명하다.

생의 역동성이다.





나는 늘 구름이 되어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

"나의 집이 하늘인 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높이 떠도는 외로움도

어느 날 비 되어

당신께 가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멀리 멀리 있어도

부르면 가까운 구름인 것을"

_<당신을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이해인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민달팽이를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