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때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영어 공부 한지 27년이 됐다. 금수강산이 거의 3번이나 바뀌었지만, 내 영어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 병적일 정도로 위축된 자아감 때문에 영어 자신감을 죽이는데 20년을 보냈고 나머지 7년 동안은 자신감을 조금씩 비축하고 있다. 요즘은 아직도 서투른 내 영어에 속상해하기보다는 나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스스로 뽐내며 영어 자신감을 키운다.
"내 한국어 실력은 진짜 유창해. 한국어도 잘하면서 영어를 이 정도 하면 정말 잘하는 거야!"
최근 알고 지내는 한국사람이 미국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분의 영어는 단어만 영어지 완전 한국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 발음이나 문법 모두 많이 부족하다. 영어 원어민 남편도 이 분을 알고 지내기에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고 했다.
"그 사람 영어 어때?"
"나쁘지 않아."
"정말? 발음도 그렇고 기본적인 영어문법도 많이 틀리는데?"
"엄청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영어를 하잖아. 그래서 영어문법이 틀려도 신경이 안 쓰여."
영어 원어민들도 신경 쓰지 않는 그분의 영어를 들으면서 원어민도 아닌 내가 그분의 영어를 평가하고 폄하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졌다. 바로 이 순간 내 영어 자신감을 옥죄이고 있던 뭔가가 풀어진 느낌이 들었다.
최근 감기에 걸려 골골한 남편을 보고, "Did you have the pill?"이라고 말한 순간 '앗! have가 아니라 take라고 말해야 했는데'라고 후회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지'라며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남편은 역시나 have를 take로 받아들여 "Yes, I took the pill"이라고 했다.
'그래, 내 영어 실력 이 정도면 잘하는 거야!'
아주 오랫동안 영어 자신감은 영어 실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청난 오해였다. 영어공부에 독약이 되는 생각이었다. 영어 자신감은 상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나의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그 정도에서 나온다. 우리 감정과 목소리는 영어문법처럼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영어 실력을 포장해 준다.
한국에 있는 은행에 전화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한참 내 전화통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남편은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너 목소리 참 행복하더라."
아니,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이 전화는 정말 하기 싫은 통화였다.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 한 거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은행 직원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을 했다. 상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최대한 존중해 주는 의도를 남편은 '행복한 목소리'로 느꼈다.
영어로 말할 때는 나도 모르게 영어 문법에 신경이 가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해 준다는 마음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행복한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바짝 긴장되고 슬픈 목소리가 나온다.
영어자신감은 영어 실력이 아닌 행복한 목소리에서 나온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행복한 목소리를 내라는 말은 아니다. 상황에 적절한 감정을 최대한 느끼며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틀린 영어문법을 쓸까 봐 두려움에 떠는 감정이 아니라, 나의 메시지를 받고 상대가 느꼈으면 하는 그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말하는데서 영어 자신감이 나온다.
하지만 가끔씩 해도 해도 깨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영어 실력 때문에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대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고도 모자라 1년 반을 영어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방법을 공부했고, 10여 년간 중학교에서 실제로 영어를 가르쳤다. 2년간 미국 대학원에서 문해 관련 공부도 했고, 지금은 또 다른 미국 대학원에서 문해 관련 박사학위 4년 차다. 이 정도면 웬만한 분야에서는 달인이 되고도 남을 만 한데, 난 영어달인이 되기에는 한참 먼 것 같다.
나와 같은 연배로 내가 다니는 대학원에 임용된 한국교수님에게 물어봤다. 한국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교육공학을 선택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영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다 알 수 없더라고요. 아무리 계속 공부해도 그건 채울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영어 질문에 대한 답을 다 해줄 수 없다. 하지만 영어문법 공부가 영어공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로 난 모든 영어 질문을 사고력 확장의 기회로 삼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어에 관한 질문을 할 때마다 재미를 느낀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며 나의 언어 사고력을 확장한다. 물론 100% 맞는 답변은 아니지만 말이다.
영어원어민들은 영어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산다. 그들에게 영어란 공기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많은 질문이 생겨 생각하고 말하고 쓰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울화가 치밀 때가 많지만, 내 머릿속 뉴런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치매 예방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쁘다.
영어는 언어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 느낌, 생각, 경험을 표현하는데 가장 기본이자 최적화된 도구다. 우리는 그동안 도구 자체를 너무 중요시했다.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뚫어져라 봤다. 한국어로 표현했던 영어로 표현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 느낌, 생각, 경험이다.
영어공부는 나의 감정을 어떻게 하면 영어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내 감정을 영어라는 도구에 끼워 맞춰 넣으려고 하지 말고, 내 감정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영어 도구를 찾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