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활기리 계곡길 탐사기
활기리에서, 봄은 소리보다 먼저 온다
삼척에 세컨하우스를 마련한 것은 삶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이중화하겠다는 선택이었다. 도시의 속도와 산의 속도를 번갈아 살겠다는, 일종의 자기 협약. 그 협약의 가장 충실한 이행지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치유의 숲이다. 4월초에 계곡길을 다녀욌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가 묻힌 준경묘가 이 계곡 안에 있다. 왕조의 뿌리가 내린 자리라는 것은, 이 땅이 오랫동안 보호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벌채가 금지되고, 사람의 손이 절제된 채 수백 년을 흘러온 곳. 건국의 전설이 깃든 땅이라는 말을 신화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백두대간이 서쪽 바람을 막고, 오십천이 계곡 안의 온습도를 조율하며, 산세가 안으로 열린 구조를 이루는 이 지형은 생태적으로도 풍요롭다. 기가 모인다는 말은, 바람이 멎고 물이 고이고 햇살이 오래 머무는 지형의 다른 표현이다.
오십천은 이 계곡에서 발원해 굽이굽이 산허리를 감아 결국 동해로 이어진다. 그 물길을 따라 도로와 탐방로가 잘 닦여 있고, 숙박 시설과 휴게소도 갖춰져 있다. 명상 프로그램과 족욕 체험도 운영된다. 아주 오지였던 이 땅이 이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2년 전 이 숲 어딘가에서 산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이곳이 아직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았음을 조용히 증명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순간 공기의 질감이 달라진다. 도시의 공기는 무언가를 섞어놓은 느낌이지만, 이곳의 공기는 단일하다. 계곡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햇살의 온기가 피부 위에서 정확히 길항한다. 몸이 알아차리는 데 오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치유센터를 지나 계곡길로 접어들면, 길은 물소리 계곡을 따라 용소폭포까지 약 4킬로미터를 이어간다. 고도 변화가 거의 없는 평탄한 구간이다. 그러나 평탄하다는 것이 단조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리를 열 번 넘게 건넌다. 매번 발밑에서 나무 데크의 진동이 다르고, 난간 아래 물의 속도도 구간마다 다르다. 어떤 다리는 수면에 잠겨 있어 물의 나무토막과 돌로 디딤돌을 놓고 건너기도하고, 어떤 다리는 높게 놓여 계곡 전체의 단면을 내려다보게 한다. 같은 물길을 다른 높이에서 반복해 건너는 이 행위는, 대상을 단일한 시점으로 고정하지 않는 훈련이다.
위를 올려다보면 백두대간 능선이 하늘을 자른다. 저 능선 너머로 두타산과 청옥산이 이어진다. 하장면 댓재까지 차로 이동하면 그 능선 위로 올라설 수 있다. 오늘은 계곡길을 택했지만, 저 백두대간은 다음 산행을 예약하는 시각적 계약서처럼 눈에 새겨진다. 그리고 환선굴. 이 일대가 품고 있는 지하의 세계까지 포함하면, 활기리는 지상과 지하, 계곡과 능선을 동시에 거느린 입체적인 땅이다.
진달래가 능선을 덮었다. 정확히는, 교목이 잎을 틔우기 전 광량의 창이 열린 그 짧은 기간을 진달래가 먼저 차지한 것이다. 그 아래에서 산괴불주머니가 노란 관 모양의 꽃을 매달고, 돌단풍이 바위 틈에서 잎을 펼쳤다. 현호색은 보랏빛으로 수면 가까이 피어 있고, 동강할미꽃은 계곡의 찬 기류가 가장 강하게 통과하는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버티고 있다. 동강할미꽃은 법정 보호종이다. 이 꽃이 이 계곡에 자생한다는 사실은, 이 땅이 아직 일정한 야생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태적 증거다.
꽃들은 저마다의 전략으로 피고, 저마다의 시간표에 따라 진다.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피는 꽃은 없다. 생존을 목적으로 피되, 그 구조가 인간의 감각에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될 뿐이다. 그것을 읽어낼 때,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 명상이 된다.
급경사가 없고, 길이 명확하며, 왕복 8킬로미터는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이 접근성이 이 길의 가치를 낮추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체력의 조건 없이 이 땅의 밀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치유의 숲이라는 이름을 정당화하는 실질적 근거다. 6개 이상의 코스가 있으니, 계절마다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같은 땅을 다른 경로로 반복해 걷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입체화하는 과정이다.
걷고 나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풍경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속도에 대한 감각이다. 오십천이 백두대간 아래에서 시작해 동해까지 닿는 데 걸리는 시간을 물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지형이 허락하는 방향으로 흐를 뿐이다. 활기리를 걷고 돌아오는 길, 나는 늘 그 기운과 흐름을 받고 온 기분이다.
동강할미꽃 현호색 산괴불주머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