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樣年華 [화양연화]

by Kai

해가 기울고 나면, 세상이 조금 더 천천히 움직였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종소리가 울리고, 교문 앞으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 하나를 사서 학원으로 향했다. 공부는 하기 싫었지만, 친구는 만나고 싶었던 아이였다. 여섯 시 무렵, 초여름의 공기에는 어쩐지 모를 애틋함이 스며 있었다.


오후 내내 데워졌던 놀이터의 모래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이면, 항상 운동장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들과 오늘의 급식 이야기, 수학 선생님의 웃긴 말버릇, 어젯밤에 꾼 터무니없는 꿈같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여름밤의 학교 운동장엔

매미 소리가 지겹도록 울렸고, 고등학교 선배들의 축구 소리, 여학생들의 수다, 멀리 흐르는 비행기 소리까지 겹겹이 쌓였다.

하늘이 분홍빛으로 번져갈 때면, 마음 어딘가 숨어 있던 그 여름의 기억들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다.

이름을 부르지도, 눈을 오래 마주치지도 못했다.

늘 해 질 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였다.

집까지 10분도 안 걸리는 골목길 대신

운동장을 가로질러 돌아가곤 한 건 아마, 그 아이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조심스럽고 설레는 경험이었다.

한여름, 열두 살 소녀의 짝사랑이었다.


여름밤의 사랑은 작고, 노랗고, 레몬 같았다.

톡 쏘면서도 시큼하고, 또 달콤한 그런 사랑.

그 시절의 낭만은 아주 작고 조용한 것들 속에 있었다.

일요일 아침 만화,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반짝이는 윤슬, 흙먼지 묻은 운동화,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던 마음, 그리고 레몬 같던 사랑.


나는 몰랐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을지,

그 짧은 순간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남을 줄도.


지금 나는 그때처럼 웃지 못하고,

그때처럼 아무 말 없이 누군가의 곁에 머무르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여름의 운동장과 이른 새벽 공기,

그리고 말하지 못한 마음은 아직도 내 안에 있다.


질리도록 듣던 매미 소리와

귀찮기만 했던 선생님의 잔소리조차 그리워지는 봄밤이다.

영원을 믿지 않았던 나는 지금, 순간으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아주 조금 더 어른이 된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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