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의 공감, 그 가벼움과 무거움.
온라인에서 ‘좋아요’나 이모티콘 클릭 한 번으로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시대다.
순간적이고 간편한 손가락 끝의 이 작은 움직임이 과연 진정한 공감의 깊이를 얼마나 담고 있을까?
이모티콘 하나에 담긴 의미가 우리들의 복잡한 마음을 모두 담을 수 있을까?
최근의 일이다. 우리 부서의 업무성과가 각종 언론에 게재되었다. 나는 10여 개의 언론사 게재 내용을 묶어 채팅방에 “00님께서 노력한 결과에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우리 부서 모두 협력한 결과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개인의 노력에 대한 인정과 칭찬, 그리고 공동체 사회의 협력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런데 부서원 모두가 내용을 읽었는데, 몇몇 직원만 코멘트를 단 것이다.
‘성과를 거양한 직원을 내가 편애한다는 생각을 직원들이 가졌을까?’‘아니면, 다른 의견이라는 것인가?’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면서 혼동이 왔다. 반응이 없는 직원들에게 “그래도 칭찬글 좀 올리지”라는 말이라도 했다간, 강요한다.라는 인식을 가질 거 같아 묻기를 포기했다. 20대 중반 딸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아빠 요즘은 다 그래요”라는 답변이 온다.
요즘은 그렇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최소한의 상식선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유독 나만 예민한 것일까? 혹시 내가 ‘라떼’? 마음이 복잡해진다.
현대인들에게 소통의 주요 매체는 메신저, SNS 댓글, DM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20~30대 세대는 SNS사용률이 높다. 소셜미디어 이용률을 살펴보면, 카카오톡 98.9%, 유튜브 84.9%, 평균 4.25개의 SNS플랫폼을 이용했다. MZ세대가 기성세대 보다 약 2배 정도 사용률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MZ세대에 국한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성세대 들도 노코멘트는 매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문화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올린 글에 달린 반응의 개수에 마음이 흔들린다. 어쩔 때는 ‘내 말을 무시하나’, ‘내가 인기가 없나’라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누가 누가 공감했고, 무반응인지에 대해 상처받기도 한다. 메시지의 내용보다는 반응에 집착하게 되고, 단톡방에 글 하나 올리는 것도 두려워한다.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불통이 되고 있다.
짧은 문자하나, 이모티콘과 기호 하나에 위축되고, 작아지는 우리의 모습.
매일 쏟아지는 무수한 사연과 호소 속에서 우리는 ‘공감피로’를 겪는다. 그러다 보니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둔감해지거나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정보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게 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안타까웠던 뉴스도, 몇 번째 보다 보면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된다. 또, ‘내가 좋아요라고 눌러봤자 뭐가 달라지나’라는 냉소가 쌓이는 것이다. 이렇게 온라인 공감이 실제 도움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무력감과 회의감을 느낀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오히려 스크롤을 내려 버리는 것이 더 쉬워진다.
타인의 감정에 계속 반응하다 보면, 정작 내 감정을 돌볼 여유가 없어지다 보니, 피로감, 불안감, 우울감이 쌓이고, 실제 대면관계에서도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한 반려견의 죽음을 애도하는 SNS글에 대한 글이 단 5분 만에 댓글이 수백 개가 달렸다. ‘너무 슬퍼요ㅠㅠ’,‘견주님 힘내세요.’...
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글에는 ‘빈곤팔이’, ‘지질하다.’,‘쑈다’,‘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라는 악성댓글이 수없이 달리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면, 우리의 공감능력이 이렇게 양극화되고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라인의 익명성은 양날의 검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솔직함의 공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책임과 잔인함의 온상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관종’이라며 비하하거나, 불행을‘자업자득’이라는 냉소적인 댓글들.
면전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말들이 익명성이라는 커튼뒤에서 쉽게 튀어나온다. 누군가의 상처는 깊어지고, 고립은 심화된다.
인정욕구와 사회적 존재
인간 욕구 중에서도 인정의 욕구를 꽤 높은 단계를 차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감정은 적개심, 분노, 모멸감... 꽤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서 정서적 안정감을 찾고 정체성을 형성한다. SNS상 공감, 댓글, 칭찬은 ‘나는 너 말을 듣고 있고’, ‘너를 인해한다’라는 공감의 신호이다. 이러한 공감 표현은 사회적 승인을 통해 도파민 분비를 유도하고 소속감과 행복 감우 높인다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SNS상 단순 팔로워 수를 늘리는 것보다 정서적 상호 작용(질)이 관계만족도에서 2.3배 높게 나타났다는 미국 하버드대 최근의 연구도 있다.
거울 뉴런의 활성화
뇌 과학적으로 볼 때 공감 신경망이 활성화된다.
타인의 감정. 그러니까 웃는 이모티콘, 칭찬 등을 볼 때 뇌의 거울 뉴런이 활성화되어 마치 자신이 그 감정을 느끼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즉, 이모티콘 하나라도 실제 공감 행동처럼 뇌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정보교환을 넘어 감정적 전이 기능을 하는 이유이다.
앞으로는 음성 기반SNS나 미타버스 기반 커뮤니케이션, AI챗봇 등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이 확장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기술이 진화하겠지만, 공감, 칭찬, 이모티콘은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정서적 다리이다.
SNS상 공감표현은 디지털시대 따뜻한 인간 언어이다.
♧ 상황 : 동료가 자신의 실수를 올렸을 때.
× : “잘 좀 챙기세요”,“다음에는 조심해요”
○ : “실수는 누구나 하죠. 인정하는 용기가 대단합니다.” / “항상 응원합니다.”
♧ 상황 : 후배가 프로젝트 성과를 자랑했을 때.
× : “끝나서 후련하겠어요 ㅠ”,“무 반응”
○ : “축하드립니다.”,“대단하시네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네요”,“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어요.”
이모티콘만으로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다. 한 문장만 추가해도 ‘진심’이 느껴진다. 같은 엄지 척이라도 메시지 유무에 따라 받는 사람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다.
♧ 상황 : 내가 중요한 내용을 올렸는데 반응이 없을 때
* 좋아요 개수 ≠ 내 가치
* 중요한 걸 내가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 숫자가 아닌 한 명의 진심 있는 반응이 더 의미 있다.
× : “ㅋㅋ”,“ㅇㅇ”같은 성의 없는 반응
* 반응할 여유가 없으면 안 해도 된다. 대신,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진심을 담아 응답
* 완벽한 위로나 칭찬은 없다. “나는 당신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충분함
× : “ㅉㅉ 한심.”,“그래서 뭐 어쩌라고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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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 얼굴 보고도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 “당사자가 나라면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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