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길에서
게트윅 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처음 숨을 제대로 쉬는 느낌을 받았다. 히드로보다 작고 낡았지만, 그 안엔 묘하게 현실적인 안도감이 있었다.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뿌연 형광등 불빛이 번졌고, 대합실엔 젖은 양모 코트 냄새와 커피, 먼지, 오래된 청소약 냄새가 섞여 떠돌았다. 파리에서 탔던 조용한 에어프랑스 항공기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건조했고, 이곳은 눅눅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눅눅함조차 따뜻하게 느껴졌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겨울은 유난히 짙었다. 돌바닥은 늘 젖어 있었고, 하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잿빛이었다. 숨 쉴 틈 없이 견고하고 아름다운 도시.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질식하고 있었다.
아리를 처음 만난 건 마레 지구의 작은 화랑이었다. 그날은 우연히 길을 잃은 듯 걷고 있었고, 그녀는 하얀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으며, 목에 걸친 스케치북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지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다. 대화는 단조로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 그날 이후 우리는 며칠에 한 번씩, 그리고 점점 더 자주 마주쳤다.
우리는 카페 드 플로르의 작은 테이블에서 오랜 시간 책을 읽었고, 국립도서관의 구석 자리에서 각자 노트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말수가 적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명확했고, 나는 그런 그녀의 균형감각에 끌렸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너는 내 그림에 잘 어울려. 사람보다 공간을 더 많이 품고 있어서 그런가 봐."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감각적이었고,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듯했다. 우리는 긴 침묵에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고, 낮은 웃음으로 감정을 나눴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결국은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지, 그게 현실이야."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내 안 어딘가를 차갑게 꺾었다.
그녀에겐 이미 약속된 사람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부모가 정해준 상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몽마르트 언덕에서였다.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는, 내 질문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그래. 있었어. 오래전부터. 하지만 넌 아니니까, 이건... 꿈 같은 거잖아."
그 말을 들은 뒤로 나는 조금씩 멀어졌다. 그러나 감정은 그리 쉽게 잘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으로 그녀를 더 깊이 안고 싶어졌다.
그날은 여느 저녁과 다르지 않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루브르 인근에서 열리는 친구의 전시를 다녀오고 돌아왔고, 나는 생제르맹의 빵집에서 사온 바게트와 와인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는 흰 셔츠 차림이었고, 목 아래 단추는 두 개쯤 풀려 있었다.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와인을 따랐다. 잔이 반쯤 비워질 때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물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기댔다. 그녀의 체온은 조용했고, 움직임은 자연스러웠다. 서로의 숨결과 온기가 가라앉는 공간 속에서, 우리는 가볍게 입을 맞췄고, 손끝으로 서로를 더듬듯 어루만졌다. 그것은 어떤 격정이 아니라, 이별을 앞둔 사람들만이 아는 부드럽고 고요한 동행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나는 그 곁에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기억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안았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지금은, 우리 둘뿐이야."
그날 밤은 조용했고, 새벽은 평온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누웠고, 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그 안에서 나는 천천히 떠나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먼저 일어나 조용히 짐을 쌌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숨소리만 고르게 뱉고 있었다. 아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향한 그녀의 등과, 희미한 햇살에 반사된 목덜미.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을 조용히 닫았다.
파리를 떠난 이유를 누구도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말하지 않았다. 예술도, 사랑도, 계절도 마무리된 도시에서 나는 더 이상 머물 이유를 찾지 못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지는 채도 낮은 풍경들. 라이카 M6를 무릎에 올려두고 셔터를 한 번 눌렀다.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지만, 그 조용한 금속 소리는 잠시 마음을 붙잡아주었다.
공항의 공기는 영국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다. 젖은 콘크리트, 오래된 카펫, 낯선 향수. 나는 그것들을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익숙한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브라이튼행 열차에 올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창밖 풍경은 점점 더 흐려졌다. 들판은 질척였고,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군 채로 서 있었다. 철로 옆의 낮은 돌담, 간간이 보이는 담쟁이 잎, 축축한 마을 이름 간판들. 그 풍경들 위로 오래된 기억들이 천천히 겹쳐졌다.
브라이튼. 처음 이 도시에 왔던 건 7년 전, 영어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도망치듯 떠났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고, 그만큼 감정은 선명했다. 예지를 만난 것도 그 시절이었다. 불쑥 피어난 감정이었고, 쉽게 다가왔지만, 더 쉽게 사라졌다.
열차 안은 조용했고, 승객들은 각자의 창에 기대고 있었다. 나는 작은 노트를 꺼내 몇 자 적다 멈췄다. 단어들이 서로를 밀어냈다. 대신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따라 시선을 흘렸다. 가끔씩은 말보다 시선이 더 오래 남는다.
브라이튼 역에 도착하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갈매기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폐를 채웠다. 퀸스 로드를 따라 걷는 동안, 시나몬 번 굽는 냄새, 카페 유리창의 김서림, 세탁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어깨선까지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단지, 그 안의 내가 달라졌을 뿐.
숙소에 짐을 두고 카메라를 챙겼다.
어디를 향한다기보다는, 어디든 닿아도 괜찮은 기분이었다. 라이카 M6는 손에 익은 무게였고, 목에 걸었을 때 묘하게 이 도시에 어울리는 리듬이 있었다.
해변에 닿았을 때, 바다는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다. 조약돌은 촉촉했고, 회색 파도는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바닷가 끝자락에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래.
예지를 떠올렸다. 잊지 않으려 한 적도, 잊으려 한 적도 없었지만, 이 장소에 오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시절, 그 공기, 그 감정. 지금은 모두 멀어졌지만, 잊히진 않았다.
파도는 계속 밀려왔다. 오래된 노래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그 안에서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