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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l 19. 2024

7. 손잡이 없는 문

나는 내가 무가치하다고 거의 모든 순간 느낀다. 그것을 형상화한다면 손잡이 없는 문이다. 나는 여닫을 수 없는 문 앞에서, 온몸으로 이 문을 부수고 탈출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느끼며 망연히 기다린다. 잇달아 몰려오는 생각들은 대개 소모적이고 하찮다. 손잡이가 없어서 문을 여닫을 수 없어도 그것은 문인가? 내가 서 있는 쪽은 안쪽인가, 바깥쪽인가?  하지만 중요한가?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가치함 앞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문에 손잡이를 다는 일밖에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어쩌면 그것은 문이 아니라 벽일지도 모른다. 손잡이가 없고 여닫을 수 없으며, 어느 쪽이 안쪽이고 바깥쪽인지 명확하게 경계 지을 수 없는 정도의 경계만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문이라기보다 벽에 가깝다. 그러나 무가치함을 벽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하기에, 시를 오랫동안 써왔던 나로서는 이 형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문이 탁월한 형상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벽은, 거의 모든 막막한 심정에 대해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오브제다. 클리셰는 필요악이다. 클리셰조차도 무가치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나는?


 “시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발 그만 썼으면 좋겠어.” “그걸로 시를 써 봐.” 내가 말하고 헤일리가 답했을 때, 모든 걸 시의 소재로 생각하는 이 시인적 사고를 너무 오랜만에 직접 들었기 때문에 눈을 반짝이며 반가워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난관에 봉착. ‘시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발 그만 쓰면 좋겠’다는 문장을 시에 쓰는 순간 다시 사랑이라는 단어가 시에 출현하게 되고, 그러면 원래 나의 의도가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저 주제의식을 대체 어 떻게 시에 살려볼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시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발 그만 쓰면 좋겠어’를 하나의 온전한 시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이것이 시 쓰는 나에게 최근 주어진 도전 과제다. 


이 도전 과제를 끝마치면 나는 또 다른 도전 과제1)를 하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손잡이 없는 문에 손잡이를 달지도 않고, 그것을 벽이라고 생각하는 등의 어떻게든 유용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 그것을 그대로 놔두는 것. 그것을 그대로 놔둔 채로 문 안쪽 혹은 바깥쪽에 남아 스스로를 좋아해 보는 것. 하지만 다시 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대체 왜 나는 나를 왜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는지? 나를 좋아해 보는 노력에 대한 무가치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무가치하고 때로는 혐오스럽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해왔다. 시를 쓰고, 달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계절마다 제철 과일을 사 먹고 가끔은 요리를 하고, 기어코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나갔다. 나는 좋아하는 나를 위해 이런 것들을 해 온 것이 아니라 무가치한 나를 위해 자리를 구하고 사람을 만났다. 혐오스러운 나를 견디기 위해 시를 쓰고 달렸다. 무가치하고 혐오스러운 나를 달래기 위해서 맛있는 것들을 사 먹였다. 무가치함으로부터 수반되는 이 행위들은 가치 있다면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에서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삶은 삶 그 자체로 늙어간다. 2) 그저 늙어가는 나의 무가치함을 바라보는 것, 어제보다 늙어버린 나의 무가치함을 지켜 보는 것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곳의 종착점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손잡이 없는 문에 손잡이를 달아보고자 하는 도전 과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글이 끝날 때가 되니 나는 여전히 손잡이 없는 문 앞 혹은 뒤에 그대로 서 있는 사람이다. 여전히 이곳이 바깥인지 안쪽인지 혹은 문의 앞쪽인지 문의 뒤쪽인지 알 길이 없다. 이 글의 종착점은 여기다. 이 도전은 실패했으나 여전히 나의 손잡이 없는 문은 늙어가고 있다.






1) 하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나의 말이나 행동과는 관계없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도전이었으니까. 그들은 본인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해도 나에게 스스로를 좋아하라는 과제를 던져주었으니까. 내게 일어난 혹은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에 상관없이 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 그것은 도전이었다. 나는 그 도전과 마주하기 위해 시 쓰기를 중단하고야 말았다. 내가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라고 공언한 활동을 더 이상하지 않고서도 과연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다른 이유를 찾게 될까,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는 채로 세상에 남아 스스로를 좋아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 나는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메리 루플,「사소한 개인적 문제」,『가장  별난 것』, 민승남 옮김, 카라칼, 2019, 110-111쪽


2) 그녀는 장차 어떻게 될까요? 내가 물었다. 누구 말이죠? 그가 말했다. 폴린, 내가 말했다. 늙겠죠, 굳 게 확신하며, 그가 말했다, 사무엘 베케트,「진정제」,『첫사랑』, 전승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9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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