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미워 나 죽을래

by 숨은그림

난생처음이었지. 불시에 급소를 찔린 느낌이 이런 기분일까. 솔직히 내가 누군가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미모와 몸매를 갖춘 건 아니지. 평범한 것은 슬픈 거라 했지만 어쩌겠어. '평범하게' 제 잘난 맛에 자부심 셀프 리필해 주며 살았지. 이런 내 소박한 자존심이 생면부지의 그녀와 남편의 공조하에 여지없이 베여버렸지.

그러니까 그날은 5월 21일, 여느 일요일인 줄 알았는데 국가가 정한 법정기념일 '부부의 날'이었다나. 그런 날이 있는 줄도 몰랐지. 뭐 알았다 해도 달라진 건 없었을 테지만. 여하튼 그날 남편의 허술한 말꼬리를 지적하다 시작된 싸움에 목숨 걸어 전면전을 치르고 출가했지. 아니, 가출했다는 말이 맞겠어. 출가와 가출은 엄연히 다르니까. 일요일 날 집 나온 주부가 갈 곳이야 뻔하지. 마트나 찜질방, 백화점 밖에 더 있겠어. 홧김에 영험한 지름신 강제로 강림시켜 백화점으로 달려갔지. 상처 입고 집 나온 심기 불편한 여자에게만큼 친절하고 상냥하며 온갖 듣기 좋은 말로 기분을 맞춰주는 곳이 백화점 말고 또 어디 있냐 말이지. 팔 걷어 부치고 슬슬 몸을 풀며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표범처럼 전투태세를 갖추고 층마다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아무리 화가 났지만 알뜰한 주부 9단이잖아. 이벤트 매장이나 할인 매장을 빼놓을 수는 없지. 사오십 대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는 브랜드의 시즌오프 할인행사가 진행 중이었어. 제법 많은 여인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기웃거리고 있었지. 무릇 패션이란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단초가 아니겠어. 온몸의 세포들을 일제히 깨워 매장 안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지. 그리 오래지 않아 '빙~고'. 나의 정체성을 찬란하게 선언해 줄 원피스를 찾았어. '부드러운 실루엣에 오리엔탈 무드의 프린트 패턴이 클래식한 분위기를......' 50% 할인이라는 착하고 파격적인 가격까지 맘에 쏙 들었지. 그렇다고 무작정 구매 의욕을 보이면 아마추어지. 프로답게 약간의 모호성을 보여야지. 44 사이즈와 66 사이즈 딱 두벌만 남았대. 당연히 66 사이즈를 넘겨받고 피팅룸으로 갔지. 이쯤에서 기시감 있는 섣부른 상상은 사양하겠어. 사이즈가 맞지 않아 지프가 올라가지 않았다거나 허리가 꽉 끼여 민망한 뱃살라인 드러났다거나 이런 상상 말이지. 아쉽게도 그런 어쭙잖은 구성은 내 사전에는 없었어. 늘 운동하고 자주 다이어트하며 관리해 왔기에 쉰을 넘긴 나이지만 날씬하다고는 못해도 섭섭한 몸매는 아니었어. 살짝 봐줄 만하지. 물론 잘록한 허리나 봉긋한 가슴, 살망한 팔과 다리를 갖진 못 했지만.

피팅룸을 나와 거울 앞에 섰더니 제법 예뻐 보였어. 매장 매니저가 그럴싸한 칭찬과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나를 한껏 치켜세웠어. 속으로 '알아 알아 나도 다 안다고...' 그때 어디선가 "예쁘네" 혼잣말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어. '음, 안목 있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네. 아무렴, 예쁜 것에 반응하는 것이 남자의 책무지' 예쁘다는 말에 약한 것이 여자의 운명 아니겠어. 천천히 돌아봤지. 그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서 있었어. 자신의 '척박한' 언어로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를 망친 것이 못내 께름칙했던 남편이 기꺼이 백화점까지 쫓아와 후폭풍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었어. 예상치 못한 남편의 등장에 자신감 한껏 차올라 거울을 보며 이런저런 맵시를 살피고 있었지. 여기까진 감동적이었어.

그때 막 옆 피팅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짜잔~ 하는 포즈를 취하면서 나왔어. 나와 같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어. 44 사이즈의. 얼른 보아도 나와 동년배처럼 보이는 얼굴인데 몸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마네킹 같은 몸매의 여자였어. 잘록한 허리, 봉긋한 가슴, 살망한 팔과 다리마저 돋보이게 하는 완전한 핏이었어. 그야말로 천의무봉 완벽했어. 같은 옷 다른 느낌 무슨 뜻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지. 부정할 수 없는 한 줄 열패감이 뇌리를 긋고 지나갔지. 순간 나는 깊은 번뇌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어. 바로 그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야~ 아~ 인간적으로 너~무 비교되는 거 아닌가? 허허" 우렁찬 목소리로 던진 촌철자살의 한마디에 백화점 전체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드는 느낌이었어. 그의 무념무상의 솔직함이 불러온 치명적인 발언에 매장에 있던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그녀와 나에게 동시에 꽂혔지. 곧이어 산 채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줄 꿈에도 모르는 남편만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어. '어쩌나' 하는 표정과 달리 남편의 말에 따라온 그녀의 눈빛은 도무지 정상참작이 안 되는 눈빛이었어. 남편의 말에 심히 공감한다는 암묵적 인정이 베여있는. 백설공주 계모 왕비 거울 깨지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지. '저 남자 오늘 제삿날이야' '미숙이 딱 저 꼴 난 적이 있었지' 들을 만큼 들었고 알 만큼 안다는 표정의 여자들은 저마다의 경험에 빙의되어 다음 상황을 침 삼키며 기대하고 있었어. 다음 장면은 안 봐도 호러와 액션 누아르의 혼재지. 서늘한 초승달처럼 벼려진 외로운 분노는 남편의 동공에 섬광을 일으키며 작열하고 있었지. 자신의 무모한 팩트 폭로가 몰고 온 섬뜩한 결말을 아직도 눈치 못 챈 천진한 표정의 남편 가슴팍에 원피스를 벗어던지고 어깨를 가격하듯 밀치며 재빨리 매장을 빠져나왔어.

어디선가 바람소리가 들려왔고 몸도 마음도 텅 비어버린 것 같았어. 실언의 역사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회자되며 그의 발목을 잡아 줄 '인간적으로 너~무 비교되는'을 곱씹으며 걸음마다 분노를 담아 한참을 걸었지.

영화 찍 듯 세상 쓸쓸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어. 냉장고 문을 열어 찬물 한 사발 들이키는데 소파 위에 아들이 읽다 만 셰익스피어가 문득 눈에 들어왔어. '격렬한 기쁨도 격렬한 종말을 맞게 될지니 불과 화약에 입 맞추듯 타오르니......'

불멸의 러브 스토리 '너 미워 나 죽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