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험난한 피난길이지만
와신상담, 이를 악물고

조령산, 주흘산 - 고려 공민왕의 피난 행렬 중에 이름 붙은 산

by 장순영

대관령을 중심으로 그 동쪽을 영동이라 일컫듯 새재를 중심으로 그 남쪽 지방을 영남嶺南이라 일컫는다.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조령산은 나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험준한 새재鳥嶺를 품에 안은 백두대간 상의 고봉으로 신라 초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자 고구려와 물물교환 등 상업 교류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 왕건과 조령산을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룬 바 있다. 서울의 진산 자리를 놓고 북한산과 경합하다가 내려와 버렸다는 설이 있을 만큼 빼어난 산이다.

그러한 조령산을 오르고자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 상의 큰 고개이며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인 해발고도 548m의 이화령梨花嶺을 산행기점으로 잡았다.


이화령에서 조망하는 주변 산세



새들이 쉬어갈 만큼 높고 험준한 산세


들머리 이화정에서 내려다보는 문경 읍내로 초여름이 짙푸르게 퍼져간다. 키 큰 침엽수와 활엽수가 고루 섞여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비교적 평탄한 숲길이지만 날이 더워 작은 오르막에도 숨이 가쁘다. 푸른 산의 싱그러운 정기를 한껏 흡입하며 오르다가 조령 샘에서 목을 축인다.

다시 녹음을 헤쳐 나가자 계단 양옆으로도 수림이 우거져 그늘을 만들어준다. 헬기장에서 멈춰 충북에서 가장 높은 백화산(해발 1063m)을 바라보고 희양산 뒤로도 속리산 지붕을 뿌옇게나마 확인한다.

헬기장을 벗어나면 바로 조령산 정상(해발 1017m)이다. 이화령에서 3km가 채 못 미치는 정상까지 무난하게 올랐지만, 과연 새들이 쉬어갈 만큼 높고 험준한 산세이긴 하다. 여기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을 만나게 된다.


‘산 말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산 전부를 가질 수 있었던 자유로운 영혼’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지현옥의 산악 일기를 정리한 책 ‘안나푸르나의 꿈’ 머리글에 적힌 문구다. 1993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끌고 정상에 올랐으며, 1998년 가셔브룸 2봉(8035m)을 무산소로 단독 등정해 한국에 8000m급 여성 단독 등반 시대를 연 산악인이다. 1999년 안나푸르나(해발 8091m)를 등정하고 하산 길에 실종되었다가 그 후 사망 처리되었다.


‘들꽃처럼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영원한 자연의 품으로 떠난 지현옥 선배를 기리며……’


조령산 정상석 옆 돌무더기에 세운 추모비가 그녀의 히말라야 족적에 비해 다소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스트feminist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정상을 내려선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 신선암봉 쪽으로 걷다가 훌륭한 조망 장소가 나와 다시 멈춰 선다. 삼각형 바위 봉우리 깃대봉 뒤로 가야 할 주흘산이 구름 아래로 아득하다. 여기서 보는 주흘산의 산세는 부드럽고 밋밋하게 보이지만 문경 쪽에서 올려다보는 산세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야성미 넘치는 주흘산 마루금은 북한산 정상부를 연상하게 했었다. 주흘산 뒤로는 월악산 가로 마루금이 영봉을 중심으로 선명하다. 사방 탁 트인 공간을 산악 전시장처럼 메운 수많은 봉우리가 가슴을 후련하게 하지만 긴 길을 제약된 시간에 도착해야 하므로 마냥 감상에 빠져들 수는 없다.

47. 조령산일대의 암봉들은 높고 솟대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다.jpg 조령산 일대의 암봉들은 높고 솟대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다


마당바위 하산로를 흘깃 쳐다만 보고 900m 떨어진 신선암봉으로 향한다. 길게 늘어진 밧줄을 붙들고 신선암봉神仙巖峰(해발 937m)에 오른다. 들머리부터 도상거리는 길지 않아도 험준하여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체력적으로 에너지 소모량이 많은 조령산이다. 신선암봉에서 보는 주변 봉우리들은 무척 가파르고 근육질마저 선명하여 위압감이 든다.

가파른 바위 구간에 설치된 밧줄을 붙들고 신선암봉을 내려서서 햇볕 쨍쨍 내리쬐기는 하지만 훤히 시계가 트인 하늘길을 걷는다. 백두대간인지라 리본들도 꽤 많이 달려있다. 양옆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험하긴 해도 시원한 조망이 수고로움을 덜어준다.

여기서 928m 봉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관악산의 6봉처럼, 설악산의 공룡능선처럼 넘으면 바로 다음 험봉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겹겹이 중첩된 산마루금과 바위와 소나무의 명품 어우러짐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는다.


파스텔톤 하늘, 창창한 푸름

노상 수려한 환상만 쫓았다면

어찌 되돌아와 조우할 수 있었을까

현기증 노랗게 일으키도록 햇빛 찬연한 건

산이 있고 구름이 있고

거기 고혹한 안개가 있었기 때문이지


침침하게 주름져 헐거운 속살 드러낸들

결코 외면 않는 그대이기에

애절하도록 숨찬 속 가다듬고

예 왔음이지


허한 육신 더 지탱해 비록

오래 머물지 못할지언정

손 뻗으면 하늘 닿을 산정에서 노래 부름에

겨운 행복 아무리해도

감출 수 없음이지



높고도 험준한 산세의 주흘산이 피난길을 더욱 고되게 하진 않았을까


고려 공민왕 즉위 8년이 되던 해인 서기 1359년,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서경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겨울, 고려군은 2만 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쳤다.


"저 붉은 이리떼 같은 놈들이 또 쳐들어 왔습니다."


그 뒤 1361년 홍건적은 2차 침략을 했다.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2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고려를 침공한 것이다.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이 고려 방어선을 돌파하고 수도 개경開京까지 쳐들어오자 공민왕은 남쪽 경상도 안동을 향해 피난행렬에 오르게 된다. 긴 피난길에 어딘들 거치지 않았겠는가. 왕실과 신하들을 이끌고 험한 주흘산을 통과하기가 무척 버거웠으리라.

주흘산主屹山은 고려 공민왕이 피난하여 임금님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칭해진 이름이다. 문경의 진산이자 문경새재의 주산이다.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새재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 세 개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는데 주흘관主屹關(조령 제1관문), 조곡관鳥谷關(조령 제2관문), 조령관鳥嶺關(조령 제3관문)이 그것이다.

문경읍에서 서북쪽으로 깊은 협곡에 있는 주흘관에서 3km 거리에 조곡관이 있고 이곳에서 3.5km 떨어져 조령관이 있다. 3관문인 조령관은 새재 정상에 자리 잡아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중창하였는데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며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부봉 너머로 주흘산 능선이 많이 가까워졌다. 꾸구리 바위 삼거리 이정표에 제3관문까지 3.4km이며 그중 1.2km가 암릉 구간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928m 봉을 지나 2관문과 3관문 갈림길에 다다라서야 접었던 스틱을 다시 편다.

삼거리에서 10여 분 거리의 깃대봉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쉽다. 깃대봉 너머 조령산의 스카이라인이 저만치 밀려났으니 꽤 부지런히 걸어온 셈이다. 긴 깃대봉 석비(해발 835m) 앞에서 다녀갔음을 인증받고 되돌아와 문경새재 3관문으로 내려선다. 조령 약수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잠시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며 홍건적의 침략 상황을 연결해 본다. 그 후 공민왕은 후퇴만 거듭했을까.

홍건적은 개경 입성 후 두 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 않는 동안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확보했다. 안동으로 무사히 피신한 공민왕은 그해 말 총사령관 정세운으로 하여금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게끔 했다. 이때의 전투에서 전의를 상실한 홍건적은 개경에서 도망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후퇴했다. 고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열어준 채 계속 추격하여 홍건적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여름에 수장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민왕은 도읍 개경을 떠난 이후 음력 11월에 개경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때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휘하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개경 탈환에 참가한 이성계는 선봉에서 적장들과 직접 맞서 개경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나 이 전쟁으로 인해 고려는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이 쇠퇴하며 고려 왕조의 멸망을 앞당기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다시 급경사와 암릉 지대를 거쳐 마패봉(해발 920m)에 올랐다가 틈 없이 부봉 쪽으로 향한다. 동암문 삼거리까지는 이제까지와 달리 편안한 흙산이었다가 부봉 오르는 구간은 바윗길로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산행 예정에 없던 부봉은 6봉까지 있는데 오늘은 1봉(해발 916m)에서 월악산 방향을 둘러보는 거로 만족하고 예정된 코스로 향한다.

48. 부봉에서 깃대봉과 조령산 마루금을 조망한다.jpg 부봉에서 깃대봉과 조령산 마루금을 조망한다


부봉 1봉에서 험로를 내려와 주흘산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후 햇볕이 무척 따갑다. 하늘재로 가는 백두대간 길을 좌측으로 두고 곧바로 진행하여 주흘 영봉(해발 1106m)에 이른다.

문경새재(조령)는 추풍령, 죽령과 함께 영남의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과거를 보러 가는 영남의 선비들이 죽령으로 가면 죽죽 낙방하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데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 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한다는 속설 때문에 많이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숲길을 타고 내려와 주흘산(해발 1030m)에 이른다. 주흘산의 최고봉은 영봉이지만 문경읍 사람들은 여기를 진산으로 여긴다. 1030m 고지인 이곳에서는 문경읍이 잘 보이는데 반해 영봉에서는 산이 가로막아 문경읍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진산은 자기 마을을 내려다보고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이 봉우리를 문경읍의 진산으로 삼아 주흘산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잠시 멈춰 쉬었다가 주봉으로 향한다. 계단을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주흘산 주봉(해발 1075m)도 마패봉이나 영봉처럼 자연 석바위에 정상 표기를 해놓았다.

멀리 소백산을 바라보고 아래로 문경시를 내려다본다. 주봉을 중심으로 여섯 방향으로 등산로가 나 있는데 막 지나온 주흘 영봉과 부봉을 지나 동화원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멋스럽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보고 이곳을 지키지 못한 신립 장군을 비웃었는데 신립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여기서 집결하여 매복했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제대로 방어했을 거로 평한 바 있었다.

내리막은 대궐 샘까지 계속되는 계단이다. 내려가면서 뒤를 올려다보니 이곳이라면 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해 임관한 소대장이라도 사수할 수 있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높은 고도의 험준한 산악지형이기 때문이다. 대궐 샘에서 갈증도 식히고 흘러내리는 땀도 씻어낸다.

포장도로가 나오고 이어 혜국사가 보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때인 창건 당시 법흥사였는데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난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들이 크게 활약하여 나라에서 은혜를 입었다 하여 절 이름을 혜국사로 바꾸었다.

사찰 아래로 흐르는 협곡과 여궁폭포를 지나 문경새재 제1관문에 도착한다. 여기서도 1km를 더 내려가 주차장에 이르러서야 숨을 몰아쉬며 길고도 험한 산행을 마친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씁쓰레하더니 목으로 넘기고 나서야 입안에 감칠맛이 돈다. 바로 완주의 달콤함이다.

49. 긴 산길을 내려와 여궁폭포에 이른다.jpg 긴 산길을 내려와 여궁폭포에 이르렀다



때 / 초여름

곳 / 이화령 - 조령산 - 마당바위 삼거리 - 신선암봉 - 깃대봉 - 제3 관문 - 마패봉 – 부봉 1봉 – 주흘산 영봉 – 주흘산 주봉 - 대궐터 - 혜국사 - 여궁폭포 - 제1 관문 -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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