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팔봉산 - 오청취당의 스물 아홉 생애
충청남도 서산 팔봉면에는 여덟 봉우리가 줄지어 아홉 개의 마을을 품에 안은 팔봉산八峰山이 있다. 서산 9경에 속하며 서산 아라메길 4구간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홍천의 팔봉산이 산 이름만으로도 브랜드 가치가 높아 이 지역 이름을 붙여 서산 팔봉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서산시 팔봉면 양길리 주차장에 이르자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들이 이 지역 특산물인 버섯과 각종 나물을 정성껏 손질하고 있다. 원점회귀를 하면 몇 가지 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청취당, 그녀를 만나며 마음도 걸음도 무거워지네
소나무 숲 길이 열리기 전에 오청취당吳淸翠堂의 시비詩碑 앞에 서게 된다. 스스로 탄식한다는 의미의 한시, ‘자탄自嘆’을 문희순 교수가 번역한 글이 새겨져 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정숙함엔 합당치 않으나
시는 울적한 회포 논할 수 있고
술은 능히 맺힌 근심 풀어낸다네.
세상일 들릴 땐 몰래 귀를 막고
속된 것 볼 때면 머리를 긁적이지
고아한 취미는 오직 한가로이 자적함일 뿐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두 자녀를 차례로 잃고 남편도 벼슬을 하지 못하여 가슴앓이하는 고뇌, 시와 술로 달래던 그녀의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인생 뭐 별 겁니까. 한 잔 받으시지요."
조선 후기 허난설헌과 함께 여러 편의 시를 남겼던 서산의 여류문인 오청취당의 기구한 운명과 그녀의 한풀이 같았던 처세를 떠올리니 마주 앉아 가득 잔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청취당에게 시는 맺힌 근심을 가라앉히고 술은 우울한 심사를 덜어낼 수 있는 안식처였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기도 했지만 시대상황으로 볼 때 속을 가눌 수 있을 만큼의 술을 아녀자가 어떻게 구해 마실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는데 어떤 문헌에도 그걸 풀어주는 글귀는 없다.
그런데 그녀의 시 ‘홀로 위로하며自遣’에서 물질을 구하는 건 그다지 큰 문젯거리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부질없이 일곱 해 우환 많았기에
오랫동안 가경의 기약 어기었구나.
(중략)
술병 끌어안고 홀로 한 잔 술 기울이며
붓 잡아 두어 수의 시를 엮어본다지.
이 어찌 아녀자의 도리가 아닌 줄 모르리오.
미쳐 날뛴 완적阮籍도 분명 나와 같았을 것을.
해주가 본관인 오청취당은 1704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새어머니가 들어와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가난한 집안의 여덟 동생들은 맏이인 청취당이 돌보아야 했다. 남달리 뛰어난 재주와 탁월한 지능을 지녔음에도 세상은 그녀에게 모질게 부닥쳤다. 진작 그녀의 재주를 알아봤던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가슴 깊이 운해의 원류를 품은 관상인데 어찌 여자로 태어나 너는 이리 녹록하기만 한고."
22세 때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사는 경주 김 씨 집안에 시집와서도 그녀 삶의 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 김한량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일찍 포기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농사를 지었다. 양반의 가문이기는 했어도 평민과 다름없이 가난에 찌든 생황이었다. 그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저절로 따라붙는 스트레스에 우울증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있으나 마나 한 남편은 견딜 수 있었으나 25세와 26세 때 연년생으로 낳은 자식을 모두 잃으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피폐하고 초췌해졌다.
청취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잃어갔다. 그녀가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시였다. 죽은 두 자식을 가슴에 묻고 피를 토하듯 시를 썼다. 29세에 요절하기까지 서산 여성으로 살며 182수의 한시를 작시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오청취당과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렸던 여인들을 떠올리며 걷는 오르막이 그리 가파름이 없는데도 초반부터 버겁다. 주차장부터 300m를 걸어와 6.5km 떨어진 구도항과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팔봉산 쪽으로 직행한다. 소박한 소망을 읊조리며 쌓아 올렸을 돌탑을 지나고 거북 약수터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게 된다.
능선에 이르러 운암사지 갈림길에서 좌측 1봉으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주 등산로인 2봉으로 가야 한다. 1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바위들이 즐비하다. 처음으로 보게 되는 바위가 특이하게 누워있다. 등산로 옆 물 마른 개울에 1봉을 향하여 누워있는 바위는 팔봉산을 향해 소원을 빌던 치성 바위라고 전해진다.
치성 바위를 향해 두 손을 모은다. 왠지 모르게 아주 친숙하고 거기 더해 무의식 중에 동지의식까지 생기고 만 청취당의 영혼이 사후 평안하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문 닫고 속된 무리 사양하며
다만 누각 엿보는 달을 사랑하였지
규중 안에 짝이 되어 서로 의지하니
씻긴 마음 고요하고도 그윽하여라
기회가 되면 그녀의 시 182수를 모두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휴대폰에 메모를 하게 된다. 그녀가 지은 한시들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70여 년이 지난 1803년에 외손자에 의해 ‘청취당집’으로 편찬되었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집안의 유물처럼 보관되어 오고 있었다.
그녀의 시에 우리 전통의 그윽한 곡주 향이 난다는 생각을 하니 오름길이 어질하다. 그럼에도 조심조심 바위들을 여럿 딛고 오르자 봉우리 암릉 틈에 예쁘장하게 1봉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들어놓았다. 암릉 막바지에는 좁은 바위틈새를 비집고 1봉(해발 210m)에 올라서서 건너편의 듬직한 바위 봉우리 2봉과 3봉을 볼 수 있다.
1봉은 벼슬에 오른 대감의 감투에 빗대 감투봉이라는 이름을 지녔고 또 노적을 쌓아 올린 모양이라 노적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봉우리에 소원을 빌면 부귀영화를 얻는다고 전해진다.
부귀영화에 대한 욕구를 버린 지 오래되어 소원 비는 걸 생략한다. 2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아찔하게 보이는데도 많은 산객들이 안정되게 오르고 있다. 태안 방향의 서해도 하늘과 맞닿아 있다.
갈림길로 다시 내려갔다가 울퉁불퉁한 암릉을 거슬러 오른다. 철제 계단은 가파르고 좁아 교차 통행에 불편스러움이 없지 않다. 계단을 오르면 지나왔던 1봉이 가깝게 조망되는 전망 지대가 나타난다. 바다와 농촌이 어우러진 팔봉산 최고의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짙게 드리운 녹음이 거추장스러운 듯 불쑥 튀어나온 바위 봉우리가 초록 가운을 걸치고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린 모습이다. 1봉의 바위들도 그러하지만 2봉에도 동물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눈에 띈다. 2봉 초입에 눈물을 글썽이는 거북이 형상의 바위를 보며 오르게 된다.
홍천의 팔봉산보다 더 가파르고 긴 계단을 오르다가 우럭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용왕이 보낸 우럭이 팔봉산 경치에 반해 돌아가지 않고 바위가 되었단다. 곳곳을 둘러보노라면 우럭뿐 아니라 상어나 고래가 왔어도 머물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보배로운 글은 숨겨 있어도 빛을 발하는 법
바다와 마을과 농토가 잘 어우러져 소박한 정경이 한눈에 잡힌다. 바다가 있는 산은 정겹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친근하다. 계곡이나 강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산은 주변을 두루 포용하고 고루 아우르기 때문이다. 사람까지도 산에서는 순수하고 아름다우니 말이다.
역시 높이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게 산이다. 크기로 순위를 매기면 착오가 생기는 게 산이다. 나름대로 멋진 장점을 보유하여 찾는 이들을 감동하게 한다. 그런 팔봉산처럼 전혀 무명의 여인이었던 청취당의 한시도 영원히 감춰져 있게 놓아두지 않는다. 보석은 어떻게든 빛을 발해 세상에 드러나는 게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국어국문학과 여성 한문학을 연구한 배재대학교 문희순 박사가 경주 김 씨 가문으로부터 문집 한 권을 입수하게 된다. 외손자에 의해 책으로 만들어진 '청취당집'이다. 드러나지 않았던 보물이 진정한 감정사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불우한 운명도 그렇거니와 더욱 닮은 건 천재적 문학성이다."
조선 후기, 시름 많은 여인의 일상과 고뇌는 그 기록의 문학적 가치를 추론할 수 있는 보고로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조선의 여류 문장가 허난설헌과 비교하곤 한다.
2봉 정상(해발 270m)에도 깜찍한 정상석을 만들어놓았다. 2봉에서 3봉으로 가는 암릉도 아기자기하다. 너덜 바위길을 지나면 용굴이 있다. 여기에 팔봉산을 수호하는 용이 있었다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위로 구멍이 있다. 용이 빠져나간 구멍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천 팔봉산의 해산 굴처럼 몸 따로 배낭 따로 빠져나가야 할 정도로 비좁다. 밖으로 빠져나와 가파르게 솟은 계단을 올라가기로 한다.
조선 광해군 때 한여현이 충청도 서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한 호산록湖山錄에 따르면 이문이라는 강도가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이 봉우리 안으로 들어와 점거하고 굴을 만든 다음 지나가는 평민들을 갈취하고 살해했다고 한다. 군사들을 풀어 도적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 포위하자 도적들이 굶주려 죽기도 하고 굴속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봉우리 뒤쪽 층암절벽은 수비하지 못하는 속수무책의 지형이었으므로 남은 도적들이 밤에 굴속에서 나와 층암절벽을 타고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굴이 이곳의 용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기록에서 보듯 팔봉산은 비록 높지 않아도 전투를 치르며 대치할 만큼 험준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어깨봉 혹은 견치봉. 힘센 용사의 어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팔봉산 정상인 3봉(해발 361.5m)에 이른다. 정상 답게 조망도 시원하게 트였고 주변 봉우리들이 양쪽으로 비켜서서 자세를 낮춘 형태다.
정상의 네모반듯한 자연석을 상석으로 사용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천제 터가 있는 팔봉산은 신령스러운 산으로 서산에 널리 알려져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는 군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또한, 이렇게 기우제를 지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가 왔다고 한다.
서쪽으로 팔봉면 일대와 태안의 이원반도가 바다를 향해 길게 이어지며 태안해안 국립공원을 지목하게 한다. 북쪽으로는 서산과 태안 사이의 가로림만 일대가 한눈에 잡힌다. 리아스식 해안과 갯벌 풍경 위로 떠 있는 고파도와 웅도가 한가롭다.
4봉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도 초록을 건너 전면으로 잔잔한 바다를 눈에 담게 된다. 3봉을 지나면서는 더욱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4봉(해발 330m)과 5봉(해발 290m), 그리고 6봉(해발 300m)을 편안하게 지나치고 7봉 오르막에 설치된 밧줄을 잡고 올라 지나온 봉우리들을 쭉 돌아보고는 삼각점이 있는 8봉(해발 319m)에 닿아 푸른 공간에 넋을 풀어놓는다.
팔봉산은 봉이 아홉 개인데 제일 작은 봉을 제외하고 팔봉산이라 하여 매년 12월 말이면 그 작은 봉우리가 자기를 넣지 않아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8봉에서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 좁고 외지면서도 소담한 어송리 임도로 내려선다. 양길리 주차장으로 회귀하는 임도는 양옆으로 푸른 활엽수가 덮어 영화나 드라마에 곧잘 나올만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자 오청취당의 일생이야말로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사극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1732년 5월 15일. 동국東國의 계수나무로 자부하였던 고독한 천재 시인 오청취당. 그녀는 셋째 아들이자 동시에 외아들을 낳은 후 겨우 스물아홉의 나이에 유통乳痛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그녀는 죽으면서도 태어난 아들의 건강함을 위안 삼는 시를 짓는다.
하늘이 어찌 이토록 나에게만 무심 하리오
총명한 아이 주어 길이 만년 의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대는 보았는가, 잠룡이 적시에 비 만나는 것을
분명코 먼 훗날 연못 속 물건만은 아니리라
바다와 산이, 사람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조화로움의 극치를 이루는 앙상블, 그곳 팔봉산에 스스로는 기구하였지만 훌륭한 유산을 남긴 여인이 있어 가슴 울렁이는 산행을 할 수 있었다.
때 / 여름
곳 / 대산읍 황금산 주차장 - 탐방로 입구 - 황금산 - 몽돌해변 - 코끼리바위 - 원점회귀 - 팔봉면 양길리 주차장 - 운암사지 갈림길 - 1봉 ~ 8봉 - 어송리 임도 - 원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