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_2

지존의 죽음

by 장순영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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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

<차 례>


지존의 죽음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대통령의 여자

유일한 용의자

신데렐라와 사탄의 시녀

오누이와 동거남

딜, 은밀한 거래

유착

동반자

아리아드네의 실

송곳 살인의 재현

익명의 제보

상사화

이중 복선

역린

고독한 도주

서러운 해후




지존의 죽음



2.


강남경찰서 강력팀에서 사흘간의 수사 자료를 모두 넘겨받았다. 김계현 팀장에게 사건을 넘기면서 양평경찰서 김현석 계장이 머리를 긁적거린다.

“미안하이. 우리 대신 수고 좀 해주시게나. 허허!”

서울로 돌아온 김계현 팀장과 이규태 형사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수사 자료를 건성으로 들춰보다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생각해?”

“뭘요?”

“뭘요라니? 뭘 묻는 줄 몰라서 되묻는 거야?”

계현은 이마에 잔뜩 주름을 만들고 규태를 쏘아봤다. 규태가 보란 듯 기지개를 켜더니 늘어지게 하품까지 한다.

178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체구를 지녔지만 꾸부정한 자세와 어수룩한 옷차림으로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계현은 규태보다 작고 조금 살이 붙기는 했으나 빈틈이 거의 없고 듬직해 보였다. 계현은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냄새 맡은 것 좀 없냔 말이야?”

“내가 개새낍니까? 냄새나 맡고 다니게.”

“자네 후각이야 개보다 훨씬 낫잖아.”

계현은 그렇게 빈정대고 껄껄 웃었다. 그랬다. 늘 풀어진 눈으로 옷맵시조차 꾀죄죄하다. 형사다운 모습이라곤 아무리 뜯어봐도 찾아내기 어려운 이규태였지만, 사건의 맥을 짚는 예리함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취합된 사건자료로 거의 오차 없이 결론을 도출해내는 추론능력만 보더라도 그는 민완 형사임이 분명했다. 툭툭, 뱉어내듯이 말대꾸하는 태도를 줄이고 머리라도 깔끔하게 빗고 다니면 업어주고 싶을 만큼 아끼는 부하다.


- 딱 2프로만 더 채우면 좋겠는데.

계현은 규태를 볼 때마다 아쉽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그래도 어딘가 오묘한 구석이 숨어 있는 부하 형사를 대견스러운 듯 쳐다보았는데 규태가 내던지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의자를 홱, 돌려버렸다.

“삼계탕 냄새 안 납니까?”

“염병할, 배고프면 나가서 혼자 먹어.”

계현은 등을 돌린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쯧쯧, 저러니 나이 서른다섯이 되도록 여자가 안 생기지.”

“좀 먹여가면서 일 시키는 후한 상사 좀 못 만나나. 지지리도 인복 없는 내 팔자야.”

규태는 일어나 코트를 집어 들고 계현의 귀 가까이에 푸념처럼 내뱉었다.

“인복 없기는 내가 더해. 배 채우고 개처럼 뛰어!”

팀장의 다그치는 소리에 대꾸도 없이 규태는 자리를 떴다.



삼계탕 대신 자장면 곱빼기를 뚝딱 먹어치운 규태는 중국집을 나와 곧바로 도곡동으로 차를 몰았다.

Y 세브란스병원 712호 특실. 박정민 사장이 입원한 병실을 노크하자 그의 부인이 문을 열었다.

“강남서 이규태 형사입니다.”

신분증을 본 그의 아내가 남편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인사를 건넸다. 오뚝한 콧날에 귀티가 줄줄 흐르는 박정민 사장은 키까지 커서 환자복 차림인데도 어딘가 우아한 멋이 풍기고 있었다. 팔뚝에 꽂은 링거는 거의 바닥이 보였다. 간호사가 링거를 새로 갈고 있었다.

박정민의 아내 정현숙도 처녀 때는 여러 영화에 주연을 맡은 톱스타 출신답게 나무랄 데 없는 미인이다. 약간 살이 붙었을 뿐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문득 그녀가 나신으로 출연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가 떠올랐다.

- 제목이 뭐였더라.

영화를 좋아하는 규태는 비록 영화관 출입은 자주 못 하지만 비번인 날에는 TV 영화방송에 채널을 고정해 놓고 시간을 죽이기 일쑤였다. 그 영화에서 전라의 몸매를 뽐냈던 정현숙의 샤워 장면이 떠올라 규태는 괜스레 그녀를 마주 보기가 민망했다.

- 정말 눈부신 장면이었어.

병실이지만 화사함을 넘어 화려하기까지 한 부부의 모습을 보니 병원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 이런 사람들 속에 있는 내 모습은…. 제길, 김 팀장 말대로 머리라도 좀 빗고 들어올 걸 그랬나.

링거를 교체하고 간호사가 나가자 규태는 정식으로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건넸다. 남편을 부축하던 정현숙이 얼른 일어나 의자를 권했다.

“박 사장님께 몇 가지 여쭤볼 게 좀 있어서….”

“알겠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정현숙은 뜻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병실을 나서는 그녀의 자태에서 미모 못지않은 교양과 바른 예의를 보았다.

규태는 다시 정민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이미 사건 당일 잠깐 양평경찰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사건을 직접 조사하거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었다.

“다치신 데는….”

“괜찮습니다. 충격이 좀 크긴 했지만.”

정민이 살짝 들춘 어깨에 압박붕대가 감겨 있었다.

“치료보다는 기자들을 피하려고 숨어 있을 뿐입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렇게 생각이 든 규태는 “다행입니다.”라고 받으며 본격 질문을 하고자 말을 이었다.

“불편하시겠지만 몇 가지만….”

“괘념치 마십시오, 최대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범인들을 빨리 잡아야 남 교수님도 편히 눈을 감으실 테니까요.”

성공한 사업가답게 정민의 풍모나 어투는 기품이 있었다. 그런 그가 환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시원스레 응해 준다.

“어딜 가시는 길이었나요?”

“이미 소문난 바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명분은 다음에 찍을 영화의 배경 장소를 물색하는 길이라고 기자들한테 둘러대기는 했습니다만…. 사실은 밀월여행 같은 거였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정민은 머리까지 긁적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너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송구스럽기까지 하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거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사내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규태는 40대 중반의 나이라는 정민의 외모가 10살쯤 아래인 자신보다도 젊어 보인다고 느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섹스파트너와 밀월여행을 즐기는 것쯤이야 이미 다반사처럼 흔한 일이다. 그걸 손가락질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열등의식일 뿐이다. 규태는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언감생심 그런 꿈조차 꿀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차라리 초라하게 인식되고는 했었다. 서른다섯의 노총각이 독신자 원룸의 화장실에서 자위행위를 끝내고 난 뒤, 자신의 꼬락서니가 한탄스러워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젊은 여자들과 중년 유부남들의 쌍쌍여행이라는 게 약간 거슬리기는 했지만, 규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규태가 다시 물었다.

“목적지는 어디였나요?”

“아, 예! 사건 현장에서 20여 분만 더 가면 제 전원주택이 한 채 있거든요. 그리 가는 중이었습니다.”

“소문처럼 현소영 씨는 남 교수님의…”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 교수님의 대학 제자이기도 하고…. 잘 아시겠지만 남 교수님의 원작인 세컨드 레이디를 통해 스타반열에 들어섰지요.”

규태는 애인이라고 해야 할지, 파트너라고 해야 할지 어휘 선택에 잠시 망설였는데 정민이 눈치 빠르게 알아서 대답해주니 후련한 만큼 고맙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시원하게 답변해줄 거라고 확신하면서 규태는 짤막하게 물었다.

“그럼, 오수연 씨는?”

“예, 제 파트너였습니다. 수연이 역시 남 교수님 제자고 영화배우 지망생이었지요. 현소영과는 대학 동기였고요.”

“그럼 남 교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인가요?”

“그렇긴 하지만…. 파트너나 여자로 소개받은 건 아닙니다.”

정민은 손을 저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컵에 물을 따랐다. 물컵을 입에서 뗀 정민은 규태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답했다.

“영화제작을 하다 보면 종종 출연 섭외를 받게 되지요.”

작년 12월,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중 방화와 외화를 통틀어 최대 관객을 동원했고, 지금도 그 기록을 경신 중인 ‘세컨드 레이디’의 흥행 성공으로 박정민 사장의 JM 시네마는 몇몇 경쟁사들을 제치고 국내 최대의 영화사로 우뚝 서게 된다.

남현태 교수가 정치권을 배경으로 미스터리 스릴러에 로맨스를 가미한 ‘세컨드 레이디’의 시나리오를 들고 JM 시네마를 방문했다. 그전에도 그의 시나리오 두 편을 영화로 만든 적이 있기에 남 교수와 박 사장은 비즈니스 이상의 교분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세컨드 레이디’, 영부인領夫人을 지칭하는 퍼스트레이디에 빗댄 제목. 대통령의 두 번째 여자 혹은 숨겨둔 여자쯤으로 의미를 부여한 제목이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정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나리오로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된 남자, 사랑하는 남자의 신분 변화와 함께 비틀려진 애정, 그런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판단이 듦과 동시에 복수를 택한 여자. 그 여자 세컨드 레이디와 대통령, 두 사람을 둘러싼 권력 상층부, 그리고 정치판의 비리와 음모 사이의 피 말리는 갈등을 기막히게 묘사했다.

전임 대통령 중 누군가를 슬그머니 빗대는 것 같으면서도 현 정권의 부조리를 은근히 파헤치고 있다. 예전 같으면 감히 영화로 만들 꿈도 꾸지 못할 내용이었다.

정민은 시나리오를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고, 동시에 대박을 예감했다. 정민은 즉각 유광진 감독을 불러 ‘세컨드 레이디’의 원고를 건넸다. 유 감독은 JM 시네마의 전속연출자로 있던 터라 그에게 남 교수의 시나리오를 검토시키고자 건넨 것이다.

정민이 시나리오에 대해 호평을 하자 현태가 계약에 대해 언급했다. 의외로 상당히 군침 도는 계약조건을 제시하는 거였다. 계약의 대전제는 흥행에 따른 러닝개런티 조건이었다.

처음엔 극장상영을 통한 총매출액의 20퍼센트를 작품료로 달라는 현태의 말에 정민은 기겁하고 거절했다.

“제작비와 광고비, 출연료 등을 빼면 중박 정도의 흥행을 올리고도 수지가 맞지 않는 게 영화제작의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이익금도 아닌 매출액의 20프로라니, 전 황당했지요. 사실 시나리오만 좋다고 영화가 모두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지금보다 훨씬 앞섰을 겁니다.”

영화 얘기로 들어서자 정민은 스스로 도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규태도 편안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건 수사를 위해 왔다는 걸 잠시 망각하기도 했다.

그 대신 유료 입장객이 1,000만 명에 미치지 않으면 작품료를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1,000만 명을 초과했을 때에 한해 총매출 대비 20퍼센트의 작품료를 달라는 남 교수님의 파격적인 제안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얼추 추산해도 수지가 맞더라고요.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지만, 남현태 교수가 누굽니까. 자신감 가득한 남 교수님한테서 이미 대박을 예감했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막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 유광진 감독이 환한 얼굴로 긍정적 의사를 표시하자 박정민 사장은 주저 없이 남현태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출연료 등의 제작비와 광고비, 일체의 관리비를 제하고도 200만 명만 들어서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판단이 섰지요. 대략 어림잡아 200만 명 정도를 손익분기점으로 잡은 거죠. 영화사 측이 거부할 수 없게끔 제반 조건을 맞춰서 들고 온 남현태 교수의 패키지 딜package deal에 구미가 당겼던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제작뿐 아니라 배급까지 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남 교수의 제안이 맘에 들었던 거지요.

남 교수의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제자인 오수연을 여주인공으로 발탁하자는 것이었다.

오수연은 두 편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경력밖에 없는 무명의 신인이라 할 수 있다. 연기력만 따라준다면 이미 알려진 흔한 얼굴보다 신선한 이미지의 신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주연 여배우로 손색이 없었다. 연기력 또한 남 교수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데다 그의 애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확인 절차가 필요치 않을 정도였기에 정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계약서에 사인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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