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산 22
돌아보면 지나온 길들이 각인될만한 자국을 남기며
걸어온 것처럼 도드라졌다. 길게 굽이치며 꺾어지는
능선의 풍광은 질곡 된 인생살이의 한 단면처럼 느껴져
한동안 아스라한 여운으로 남을 것만 같다.
38선을 많이 넘어선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숨은 듯 솟아 있는 각흘산角屹山은 소의 뿔을 닮은 각흘봉이 있어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청정계곡을 품은 여름철 최고의 산행지라는 카피 문구를 접했고 빼어난 계곡, 부드러운 능선, 웅장한 바위가 삼위일체를 이룬 초여름 산이라기에 때맞춰 각흘산을 찾았다. 한북정맥의 여러 산을 다니며 인근에 각흘산이 있음을 알고 신록이 무성해진 초여름에 그 들머리로 자등현을 택했다.
산 일대가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인근에 포 사격장이 있어 포 훈련을 쉴 것 같은 주말에 명성산까지 이어 내려가고자 한 것이다. 자등령紫登嶺이라고도 부르는 자등현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과 강원도 철원군 서면의 경계선에 있는 고개로 동쪽으로 광덕산, 서쪽으로 각흘산이 마주하고 47번 국도가 이 고개 남북으로 포천과 철원을 이어주고 있다.
아군이 포격한 포탄을 피해 산을 오르다
자등현에도 광덕산 들머리인 광덕고개처럼 반달곰 두 마리가 반겨준다. 여기서도 주차장 맞은편의 박달봉 능선을 타고 광덕산으로 오를 수 있다. 즉 한북정맥이 광덕산에서 분기해 이곳 자등현을 통해 명성산을 지나는 명성 지맥으로 국내 최북단의 지맥이 이곳이다.
각흘산 진입로에 꽤 많은 리본이 걸려있다. 산은 존재함으로써 명성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찾기 마련인가 보다. 군사 지역답게 경고 팻말이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용화동 포병사격 표적 지역이므로 경보용 적색 깃발이 게양되었을 때는 사격 중이란다. 노란색 바탕에 적색 문구 경고표지판이 설치된 지역은 포탄 낙하지역이라고 하니 색맹인 선객들은 결코 혼자 와서는 안 될 산이라는 얘기다.
화약 냄새 대신 초록 상큼한 숲길과 바윗길을 고루 지나 고도를 높여가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시야가 열린다. 급한 경사가 있긴 하지만 짧게 끊어져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이 굽이굽이 곡선을 이룬다.
정상에 다가가면서 포탄 낙하지점이 근방에 있다는 팻말이 종종 눈에 띈다. 포격 훈련장에 산행을 허용하면서 군인들의 수고로움이 늘어났을 것이다.
굴참나무와 신갈나무 등이 울창한 가파른 숲을 지나다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바위를 보게 된다. 쪼개진 바위는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며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는 많은 소나무의 생존력을 보아왔지만, 이 소나무는 엄청난 파괴력까지 지닌 데다 가지도 곧게 뻗고 잎도 푸르러 지나는 이들로 하여금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든다.
곧이어 가게 될 명성산이 삼각봉을 내밀어 각흘산과 나란히 섰다. 산 아래로 용화저수지와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포천 쪽으로는 가리산과 백운산 등이 겹겹이 중첩되고 있다. 헬기장을 지나 정상을 향해 걷다가 접혀있는 적색 깃발을 보게 된다. 훈련이 없는 주말이라 접어놓았나 보다.
“사격할 때면 접힌 깃발을 풀려고 여기까지 올라와야 하는 건가?”
아마도 포병 중 관측병이 관측 임무를 겸해 깃발을 담당할지도 모르겠다.
“근처에 불발탄이나 없어야 할 텐데…….”
심란하게 도착한 정상(해발 838m)에서는 일말의 우려가 말끔히 가신다. 빗발치는 포격을 뚫고 안전한 평화구역으로 들어선 기분이 드는 건 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조망권에 창창하게 트인 시계 덕분이다.
드문드문 적송이 있는 바위지대 정상에서 사방팔방 눈길을 던진다. 경기 북부와 철원 및 화천 일대의 산들이 장쾌하게 이어져 푸름을 뿜어내고 있다. 왼쪽으로 낯익은 광덕산부터 백운산과 국망봉이 한북정맥을 굽이치게 한다. 또 오른쪽으로 철원평야 위로 지장봉과 금학산이 이어졌다. 산이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은 산객들의 발길이 지속해서 이어진다. 사면으로 뻗은 능선을 내려서면서도 시선을 멀리 둘 수 있어 좋다. 산불이 옮겨 붙는 것을 제어하기 위한 방화선으로 갈라진 능선이 마치 큰 구렁이의 꿈틀거림처럼 길게 이어진다. 이 산을 찾은 산악인들이 흔히 속세를 벗어나 수도의 길을 걷는 기분이라고 한다더니 과장된 표현이 아니란 생각이다.
돌아보면 지나온 길들이 각인될만한 자국을 남기며 걸어온 것처럼 도드라졌다. 길게 굽이치며 꺾어지는 능선의 풍광은 질곡 된 인생살이의 한 단면처럼 느껴져 한동안 아스라한 여운으로 남을 것만 같다.
다시 보는 빨간 우체통
각흘산 능선을 뒤로하고 명성산으로 향한다. 정상 일대의 밧줄 늘어뜨린 바위 구간을 내려서면 아늑한 능선이 이어진다. 적당한 완급의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약사령으로 내려선다. 약사령은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를 주소지로 하는데 각흘산과 명성산을 가르는 분기점이다. 여기에 이르니 어찌 아니 그러할까. 그분의 모습이 생생하고 그분의 많은 어록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힘이 제일이요, 힘이 곧 정의요, 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불행하고 부조리한 생각에 빠졌다. 관민을 막론하고 권력 만능, 권력 숭배 사고에 빠졌다. 힘은 정의를 가져야 하고 정의는 힘을 가져야 할 터인데 정의에 힘을 줄 수 없으므로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광복군 항일독립운동을 했고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식인 의식개혁 운동에 앞장섰으며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반독재 및 민주화운동을 이끈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바로 이곳에 등산을 왔다가 실족사한다. 아니 그렇게 규정지었다. 산에서의 안전을 노상 강조한 등반가가 구두를 신고 굳이 14m나 되는 절벽으로 내려오다가 추락사했을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 경위를 조사했으나 변사사건 기록 폐기, 수사 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정원 자료 미확보 등으로 2004년 그의 사인규명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러나 2012년 8월,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그의 죽음이 재조명되기도 하였으나 역사 속 진실은 아직 미궁에 빠진 상태다.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받기도 했던 그를 잠시 더듬어보다가 씁쓸함을 누르고 명성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후 고구려를 세워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승승장구 세력을 확장했다가 왕건에게 패해 명성산에 은거한 궁예가 왕건과의 최후 격전에서 대패하여 온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다가 같은 의미의 명성산鳴聲山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산을 시작하니 그만큼 고도가 급해진다. 능선에 이르러 호흡을 가다듬고 목도 축인다. 곧 시작될 무더위를 벗어나면 이 능선의 억새들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 제 빛깔을 뽐낼 것이다.
용화저수지와 약사령으로 내려서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300m를 더 가면 명성산 정상이다. 산안고개 갈림길을 지나 명성산 정상(해발 923m)에 도착하니 반갑고도 감회가 새롭다. 세 번째의 조우다. 가을 명성산의 억새 탐방과 겨울 눈꽃 산행에 이어 신록의 명성산을 접하게 되자 더더욱 친근감이 든다.
“꽃피는 봄에 다시 한번 오시게나.”
“봄에 또요?”
“싫으면 관두시게.”
“…….”
확실한 기약을 할 수 없어 흘깃 최고봉의 눈치를 살피다가 삼각봉으로 건너간다.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도 포천으로 넘어서게 된다. 두 구간의 경계점을 지나 삼각봉(해발 906m) 해태상과 재회의 반가움을 나눈다.
“그동안 명성산에 산불이 나진 않았죠?”
주로 궁궐에 세운 해태상을 2008년 이곳에 세워놓은 건 산불 예방을 염원하는 차원에서다.
“내가 누군가. 산불을 물리치는 신이 아닌가 말일세.”
포천을 바라보는 해태상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한다. 명성산과 궁예봉에 눈길을 주었다가 삼각봉을 지나자 초여름 햇빛 머금은 산정호수가 내려다보인다. 능선을 길게 걸어와 팔각정 아래 ‘1년 후에 받는 편지’라고 적힌 빨간 우체통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천년수千年水. 나라 잃은 궁예의 한을 달래주려는 양 눈물처럼 샘솟았다는 궁예 약수는 극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다는데 굳이 ‘음용 금지’라고 적어놓지 않아도 먹을 리 없는 불결한 물이 한에 못 이긴 궁예의 피눈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해가 구름을 비켜났을 때 은물결 넘실대던 억새밭에서 그 가을의 풍광을 기억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힘에 부쳐 가느다란 허리가 휘고 색도 바랐지만, 곧 보란 듯 일어설 억새군락을 둘러보다가 억새 바람길의 긴 데크를 내려간다.
궁예의 울음이 폭포 되어 내린다는 등룡폭포에서 잠시 패자의 설움을 새겨보다가 아래 비선폭포를 지나고 식당 지대 골목길을 내려서서 산정호수에 이른다.
인공 조성한 관개용 저수지이지만 언제 들러도 늘 정겹고 푸근하여 대할 때마다 미소 짓게 하는 산정호수 푸른 물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산행을 마친다.
철쭉 꽃잎 모두 떨어졌으나 이 산,
녹음 짙어 더욱 푸르기만 하네.
골짜기 짙게 드리운 초록 향기,
소쩍새 울음소리
더없이 청아하기만 하네.
초여름 신록 딛고 오른 산정에서
땀에 젖고 계곡물에 젖었다가
다시 푸름에 젖는다네.
때 / 초여름
곳 / 자등현 - 각흘산 - 약사령 - 명성산 - 삼각봉 - 팔각정 - 억새군락 - 등룡폭포 - 비선폭포 - 산정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