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산 24
등성이마다, 고개마다, 봉우리마다 숨 가쁘고 뚝뚝 떨어진
땀방울로 축축하다. 한세월 지나고 나면 지워져도 그만일
자취일 수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내면 깊숙이 여며두고
언제든 펼칠 수 있게 포개 두고 싶다.
경기도 동두천시와 양주시 그리고 포천시를 경계로 칠봉산, 해룡산, 왕방산, 국사봉, 소요산, 마차산의 여섯 산을 연계하여 산행할 수 있는 종주 코스가 있다. 칠봉산 아래 일련사 입구에서 마차산을 하산한 동광교까지 무려 50여 km의 산행로를 조성하여 많은 등산 마니아들을 뒤숭숭하게 하거나 몸살 나게 한다.
“왜 산 타는 이들은 무리이다 싶을 정도의 강행군에 연연하는 것일까. 나는 또 왜?”
3 산, 4 산, 5 산, 6 산…… 여러 차례 산을 이어 탐방하면서 그저 사람의 타고난 습성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인간의 본성, 이기적 욕심이 배인 그 본성.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
“그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런 코스가 있었군.”
알아보니 길도 잘 조성되어 있고 이정표도 제대로 설치되어 길을 헤맬 염려는 접어도 될 듯싶었다. 북한산에서 도봉산, 사패산, 수락산을 거쳐 불암산까지, 혹은 불암산에서 거꾸로 북한산을 연계하는 수도권의 5 산 종주 길보다는 수월해 보인다.
“그렇다면 해야지.”
동두천으로 간다. 거기 있는 여섯 산을 종주하기 위해.
임금 행차에 맞춰 명명된 일곱 봉우리
수도권 1호선 전철을 타고 지행역에서 내려 송내 삼거리로 간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8시가 조금 지나서이다. 숙고 끝에 산행 시작을 이 시간대에 맞추는 게 여러모로 수월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조형 탑 맞은편 전철 교각 아래로 통과하니 일련사 입구에 동두천 6 산 종주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6 산 종주 시작이라는 방향 표지판에는 종주 끝 지점인 동광교까지 50.3km라고 적혀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팔다리를 흔들며 스트레칭을 한다. 산을 다니다 보니 더러 달밤에 체조하게 된다. 헤드 랜턴을 착용하고 이리저리 비춰본다. 새 배터리로 교체해서 무척 밝아졌다.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쉬이 진정되지 않는 긴장감을 추스른다.
보호난간이 설치된 왼쪽 계곡을 따라 마을을 지나면 작은 사찰 일련사가 있다. 정적이 깔린 사찰 왼편을 조용히 걸어 화단과 장독대 사이로 올라간다. 일련사 삼거리 0.2km라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수도권 불수사도북과 북도사수불의 다섯 산을 혼자 걸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일단 낯설다. 이곳의 여섯 산 중 소요산과 왕방산은 다녀간 적이 있지만, 나머지 산들은 미답지이다. 고작 인터넷에서 지도를 검색한 정도의 정보력만 지니고 맞서니 생소하여 껄끄럽기까지 하다. 아마도 깜깜한 밤중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그래서 더 혼자라는 의식이 불안감을 동반하는 것 같다.
“혼자일 리가 있나. 지금 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를 사귀러 왔지 않은가.”
일련사 삼거리에서 칠봉산 정상까지 3.7km를 걸으면서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하고 마음을 다진다.
여정 아무리 길다 한들 있는 노자
다 지니고 갈 셈인가
먼 산 오른다고 등짐 가득 채워
걸음 옮기기조차 힘들어할 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지녀 편할 만큼만
필요한 만큼만
딱 그만큼만 등에 지고
유유자적 유람하듯,
옛 벗 찾아가듯 자연에 녹아드세
오른 산에설랑
그나마 욕구의 찌꺼기가 채운 괜한 무게까지
훌훌 털어놓고 내려가세
동두천시 탑동동과 송내동, 포천시 설운동, 그리고 양주시 봉양동에 걸친 칠봉산七峰山은 양주시 내촌동 뒷산에서 보면 일곱 봉우리가 뚜렷하게 보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단풍 곱게 물드는 가을이면 단풍나무 사이의 기암괴석이 한 폭 비단 병풍과 흡사하여 금병산錦屛山으로도 불렸다.
가을도 만추에 접어들어 기온이 떨어질까 우려가 없지 않았는데 신선한 공기가 밤길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멧돼지가 덤벼들진 않겠지.”
현실성 없는 걱정일 거라고 위안하며 칠봉산의 첫 번째 봉우리에 닿는다. 임금이 산을 오르기 위해 떠난 곳이라는 발리봉發離峰이다.
“어떤 임금이지?”
밧줄을 붙들고 경사 급한 바윗길을 내려오면서도 궁금증이 동한다. 아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면 안 될 것 같아 무어든 떠올리고 몰입하려는 본능 의식일 게다.
두 번째 매봉(응봉)은 임금께서 수렵할 때마다 사냥에 필요한 매를 날렸던 곳이라고 적혀있다. 매가 날아갔을 법한 곳엔 점점이 희미한 별빛들이 그나마 산중에서의 적막감을 덜어준다.
평범한 바위 옆에 표지판이 있어 랜턴을 비춰보니 아들바위라고 적혀있다. 곳곳에 수수하나마 산행하는 이들을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지루함을 덜어주어 고맙다. 널찍한 공터 깃대봉은 임금이 수렵을 시작한다는 표시 깃발을 꽂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지만, 그냥 지나쳐 다음 봉우리로 향한다.
“이 봉우리엔 돌이 꽤 많구나.”
임금이 이렇게 말해서 석봉石峯(해발 518m)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봉우리에 이르러 어느 임금인지 유추해본다. 조선 시대 이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는 수도 한성부와 가깝고, 산과 들판이 알맞게 펼쳐져 있어 왕실의 강무장, 즉 임금이 공식적으로 사냥하던 곳이었다.
성종 때에는 백성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농한기에 사냥을 나갔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왕조 초기 임금들이 양주에서 자주 강무를 하였는데, 태종은 11회, 세종은 36회, 단종은 5회, 세조는 26회, 성종은 21회, 연산군은 15회 등 자주 양주 땅으로 거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칠봉산은 세조가 왕위찬탈 과정 중에 많은 신하를 죽인 것을 참회하여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다가 사냥을 하러 이 산에 오른 것이 계기가 되어 어등산於登山으로 불렸었다고 한다. 어쨌든 사냥하기 좋아하는 조선조의 왕들이 이 산봉우리 명칭의 원인제공을 한 건 분명한 것 같다.
MTB 산악자전거 코스로 길이 이어지다가 투구봉鬪具峰에 이르니 이곳은 임금이 쉬자 군사가 따라 쉬면서 갑옷과 투구를 벗어놓은 곳이라 한다. 여기서 내려서면 MTB 코스와 등산로가 갈라진다.
오늘 밤부터 내일 저녁나절쯤까지 이어지게 될 여섯 산의 첫 산인 칠봉산 정상(해발 506m)에 올라 배낭을 내려놓는다. 묵직해진 어깨 근육을 풀려 스트레칭을 하고 적당히 허기도 채운다.
“돌이 많으니 두루 조심들 하여라.”
임금께서 이렇게 당부했다고 해서 이곳 정상은 돌봉突峰이라고도 부른단다. 누군지 몰라도 돌에 민감하고 신하들 안전을 배려하는 살가운 임금이다.
다시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났던 곳이라 해서 일컫는 수리봉(솔리봉率離峰)까지 일곱 봉우리를 모두 지났다. 각 봉우리마다 화천 1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임금님께서’로 시작하는 명칭 유래를 적어 세워놓아 임금님이 행차하는 착각에 빠져 지루하지 않게 올라왔다. 밤이지만 칠봉산은 거칠지 않은 등산로여서 진행에 무리가 없었다.
칠봉산을 벗어나면서 이어지는 숲길은 깊어 가는 밤과 함께 더욱 적막하고 스산하다. 가족들을 떠올려보고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회상하면서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고요를 벗 삼아 해룡산과 천보산의 갈림길인 장림고개를 지난다. 밝은 낮이었으면 천보산을 다녀왔다가 해룡산으로 갔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냥 지나치며 칠봉산에서 능선으로 연결되어 양주와 포천을 가르는 산줄기의 중앙부에 솟은 시커먼 실루엣만 훔쳐본다.
조선 시대 어느 임금이 난을 당해 이 산에 피신하여 목숨을 건지자 이 산을 금은보화로 치장하라고 명하였다. 신하가 난리 후라 금은보화를 구하기가 어려워 하늘 밑에 보배로운 산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여 천보산天寶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지만, 이 설화야말로 약장 밑에도 명졸이 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옛날부터 이 일대 주민들은 천보산도 뭉뚱그려 칠봉산으로 불러왔다.
“어명에 따라 금은보화로 치장했더라면 이 지역주민들은 대대손손 부자로 살았을 텐데.”
생뚱맞은 생각을 하다가 해룡산으로 진입하여 임도를 지난다. 동두천시와 포천시 선단동 경계에 있는 해룡산海龍山은 정상 일대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비가 내리기를 빌며 연못 주위를 밟고 뛰어다니면 비가 내리거나 적어도 날씨가 흐려지는 효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연못은 조선 시대 때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데 연못 주변을 밟고 뛰었으니 무너져 연못이 메꿔졌을 거로 추측하게 된다. 또 해룡산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이 산에 살던 이무기가 그 물을 이용해 용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역시 해룡산의 명칭과 관련한 무수한 허구 중 하나일 것이다.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4대 명필인 봉래 양사언이 이 산을 즐겨 찾았다고 하는데 유명한 시조 태산가를 짓고 금강산에도 자주 다녔다니 그분 또한 원효대사나 최치원 못지않은 알피니스트alpinist였던가 보다.
해룡산(해발 661m)의 실제 정상위치인 군사시설은 주변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여 용의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혼자 내버려진 듯한 고독감이 때론 달콤한 향으로
군사시설 왼쪽으로 차도가 닦여있는데 아마도 보급로인 듯하다. 이 길을 따라 오지재烏知滓고개에 닿는다. 동두천시 탑동에서 포천시 선단동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지금은 왕방 터널이 생겨 대다수 차들이 그 길을 이용한다. 오지재란 옹기를 굽고 난 후에 남는 찌꺼기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 주변에 가마터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내처 걸음을 빨리하여 대진대학교 갈림길에 이르니 능선 길의 시작이다. 인근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멎으면서 다시 고요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내버려진 듯한 고독감이 때론 달콤한 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나 적막한 고독은 차라리 끈끈한 동반보다도 더 푸근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일 때에도 홀로의 세상을 감내하고 즐기기도 하는 것일 게다.
돌탑 위로 몇 점의 별들이 점멸한다. 여치 소리도 들리고 어디선가 맹꽁이도 운다. 왕방산 정상(해발 737.2m)까지도 그리 험한 경우를 접하지 않고 도착했다. 포천읍 서쪽에 우뚝 솟아 포천의 진산으로 불려 온 왕방산王方山은 동두천과 접해 있다.
신라 헌강왕 때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이곳에서 수행하던 도선국사를 격려하였다 해서 왕방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이 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해 체류하여 왕방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왕방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설에는 고개를 흔들게 된다. 왕위에서 물러난 이성계는 왕자의 난을 접하며 수많은 절을 방문했었는데 그 절들은 왕이 방문했다는 의미를 사찰 이름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천보산맥의 북단에 자리한 왕방산의 호병골에 들어서면 맑은 계류가 흐르는 수려한 산세를 보며 여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이라 그 길로 올라왔던 기억만 떠오른다.
왕방산에서 내려와 국사봉으로 향하면서는 크고 작은 봉우리를 반복해서 오르내리게 된다. 국사봉으로 가는 1.2km의 오름길은 오늘 걸었던 길 중 가장 고되고 숨이 차다. 넓은 헬기장인 국사봉(해발 754m)에 이르러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힌다.
왕방산의 상봉上峰을 국사봉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3 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이 속세를 떠나 이 산에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했다 하여 국사봉이라 칭했으며, 왕이 이색을 염두에 두고 이 산을 바라봤다 하여 왕망산이라 부른 것이 왕방산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역시 스토리의 편집일 것이다.
부대 좌측의 담장을 끼고 걷다가 구불구불한 군사도로를 따라 1.3km 더 내려가면 수위봉고개에 이른다. 수위봉고개 왼편으로 올라가서 소요산과 국사봉이 갈라지는 이정표를 보게 된다. 뒤돌아 올려다보니 국사봉과 정상의 군부대가 거무튀튀한 실루엣으로 아직도 먼 길을 배웅해준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새목고개에 도착했다. 여기서 임도를 따라가면 동점마을로 내려갈 수 있다. 소요산 칼바위 능선까지 6.3km이며 종주 코스의 종점인 동두천 동광교까지는 약 31.6km가 남았다.
‘동두천 방향으로 미군 사격장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약 0.9km에 걸쳐 철조망이 있어 산행에 조심해야 한다.’
소요산에서 수위봉 철조망 구간에 대한 안내판에 랜턴을 비추니 남은 거리 때문에 부담스럽던 차에 기분마저 축 처지고 만다. 조심스럽다. 수도 없이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꽤 많이 다녀간 소요산逍遙山이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수많은 전설을 지닌 명승지를 품고 있어 경기 소금강이라 칭하는 소요산을 매월당 김시습처럼 유람하듯 소요했었다.
“그런 소요산을 이렇게 오르다니.”
지금까지의 산들과 달리 소요산은 바위산이다. 게다가 이름 그대로 칼바위로 향하니 바위 구간의 밤길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어서 거의 기어오르게 된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걸 느낀다.
칼바위 능선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자 졸음까지 몰려온다. 잠시 쉬며 눈을 붙이려 했지만, 한기가 파고들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상백운대(해발 560.5m)에 이르러서도 어둠은 걷힐 줄을 모른다. 여기서 300m를 지나 왼쪽의 중백운대로 향하는 길이 보통 소요산을 일주하는 산행코스인데 여섯 산의 마지막 남은 마차산을 가려면 덕일봉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감투봉이라고도 부르는 덕일봉(해발 535.6m)에서 포천시 신북면과 연천군 청산면으로 각각 길이 갈라진다. 아무 상념 없이 던진 시선에 까만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보인다. 완전히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헤드 랜턴을 접었다. 그나마 머리가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말턱고개를 가리키는 청산면 방향으로 무거워진 걸음을 내디뎌 안전로프가 설치된 경사 지대를 더듬더듬 내려선다. 낙엽 수북한 내리막길도 골프장 울타리 옆으로 철조망이 엉켜있어 걸음을 더디게 한다. 근근이 차도로 내려서자 세상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초성리 버스정류장 옆의 말턱고개 약수터를 지나 한탄강 관광지 방향으로 가면서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문을 연 식당이 있으면 무조건 들어가고 싶다.
“어이구, 젊지도 않음시롱 뭔 고생을 요로콤 사서 한다요. 어여 앉으쇼.”
무조건 들어가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한 시간여 쪽잠을 잤다가 다시 출발할 때는 조금이나마 생기가 도는 기분이다.
“꼭 완주하시쇼잉.”
식당 주인한테 손을 흔들고 초성교를 건너는데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가며 찬바람을 일으킨다. 다리 건너로 보이는 연천군 입간판 뒤로 마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과 동두천시의 경계 선상에서 경원선 철길을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하고 있음에도 소요산의 유명세에 밀려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이슬 먹은 낙엽이 매우 미끄럽다. 밧줄에 의지하며 급경사 깔딱 고개를 올라 임도에 이르러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마차산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임도와 무성한 수풀 지대, 밧줄 늘어뜨린 비탈 경사 구간을 고루 지나는 중에 급격하게 몸의 감각이 무뎌지는 걸 의식하게 된다.
향수로 남고 그리움으로 품어진 그 산, 아득한 그 길들
양원리 고개를 지나 간신히 정상 직전에 다다르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듯한 산성이 보인다. 예로부터 이 지역이 군사요충지였음을 알려주는 마차산성의 흔적이다. 또 참호가 자주 눈에 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북한의 군사 동향이 심상치 않아 춘천 북방에서 마차산과 임진강 일대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치게 된다. 마차산은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한 격전장이었으며 이 산 계곡에는 시신이 가득 덮였다고 전한다.
쓰라린 상처를 품은 마차산의 정상은 고요하게 찬바람만 흘려보내고 있다. 날씨도 그다지 청명하지 않아 정상부의 높은 수리바위에서 철길 건너 소요산이 제대로 보일 뿐 파주 감악산까지 연결되는 능선은 흐릿하게 끊어져 버렸다.
그래도 전방의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수고했노라고 성원을 보내주고, 갈색 억새들이 치어리더처럼 여린 허리를 흔들며 응원해준다.
정상석 뒷면에는 마고할미의 전설이 적혀있다. 각지의 영험한 산을 골라 다산과 풍요를 베푸는 마고할미가 세상의 만사를 주재하다가, 이곳 정상 수리바위에 앉아 옥비녀와 구슬을 갈고 옷매무새를 고쳤다고 한다. 그래서 산의 이름도 갈 마磨와 비녀 차釵 자를 써서 마차산磨釵山으로 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어렴풋하게나마 어제부터 지나온 길들을 더듬어보고 하산 길을 챙긴다. 늦은맥이 고개로 내려서고 감악지맥 간파리 방향의 갈림길에 이르러 작은 바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나무가 흔들리고 숲이 회전한다. 진작 경험해보았던 증세다. 허기지고 갈증도 나고 졸음이 몰려오는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한 시간 가까이 흘려보내며 그럭저럭 원인을 해소하고 일어선다.
산불감시초소를 내려선 다음 만수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면서 긴 종주의 끝자락을 보게 된다. 칠봉산에서 왕방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돌아보고 동두천 6 산 종주의 마지막 이정표를 대하자 쿵쿵 가슴이 뛰다가 아릿하게 저린다.
막 내려와 걸음 멈추고 뒤돌아보노라니 아련하기만 하다. 등성이마다, 고개마다, 봉우리마다 숨 가쁘고 뚝뚝 떨어진 땀방울로 축축하다. 한세월 지나고 나면 지워져도 그만일 자취일 수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내면 깊숙이 여며두고 언제든 펼칠 수 있게 포개 두고 싶다.
눈에 가득 드리웠던 갈색 나뭇잎들, 뇌리에 깊이 박힌 각진 바위들, 푸름 잃지 않은 소나무와 막 떨어진 낙엽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 저 너머 너머라 이제 보이진 않아도 내가 걸어온 그 산 그 봉우리들 가슴 가득 향수로 남는다.
동두천경찰서를 지나 마을에 들어섰다가 동광교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보았던 수없이 많은 다리 중 가장 반가운 다리에서 다시 걸음 멈춰 또 한 번 온 길을 되돌아본다. 향수로 남고 그리움으로 품어진 그 산, 아득한 그 길들은 쿵쿵 감동으로 울림 되고 눈물 되어 두 뺨을 흥건히 적실 것만 같다.
때 / 늦가을
곳 / 송내 삼거리 - 일련사 - 일련사 삼거리 - 칠봉산 - 장림고개 - 천보산 갈림길 - 해룡산 - 오지재 고개 - 왕방산 - 국사봉 - 새목고개 - 나한대 갈림길 - 소요산 - 상백운대 - 중백운대 갈림길 - 덕일봉 - 동막고개 - 동막골 갈림길 - 소요지맥 갈림길 - 임도 - 말뚝 약수터 - 초성교 - 한탄강 임도 갈림길 - 임도 갈림길 - 천둥로 이정표 - 양원리 고개 - 마차산 - 늦은 고개 - 흰돌 바위 - 산불감시탑 - 광덕사 갈림길- 동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