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굴과 오형돌탑을 보며
숙연해지다

금오산 -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와 도학의 이념

by 장순영

경상북도 구미시와 김천시의 경계에 있는 금오산은 1970년 6월 국내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0년대 수출정책에 따른 구미시의 성장과 함께 관광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더 많은 산객을 불러 모으는 명산으로 거듭났다.

신라 때의 승려 아도阿道가 이곳을 지나다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金烏山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금오산은 능선이 왕王 자 형상을 하고 있어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이 산을 보고 왕기가 서려 있다고도 하였으며, 경북 선산에서 보면 붓끝처럼 보이는 금오산의 필봉筆峰으로 말미암아 선산에는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다고도 하였다.

칠곡 인동에서는 귀인이 관을 쓴 것처럼 보이는 금오산을 귀봉貴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예로부터 큰 부자와 높은 벼슬아치가 흔한 까닭이 이 때문이라면서 자랑거리로 삼기도 한다.



금오산 자락에 울리는 회고가懷古歌와 도학의 가르침


아침 금오산은 옅은 운무에 살짝 가려져 있다. 완연하지는 않아도 이미 문턱을 넘어선 봄철 주말인지라 많은 탐방객이 그곳에 찾아왔다. 주차장 아래쪽의 커다란 저수지, 금오지는 눈만 맞추고 통과한다. 고려 말 성리학자인 야은 길재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채미정(명승 제52호)에 잠시 들러본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저도 모르게 길재의 회고가懷古歌를 읊조리게 된다. 조선 2대 정종 때, 왕세제이자 실권자였던 이방원이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길재를 불러 태상박사에 임명하려 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 그는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편다. 이방원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기고 예를 다해 보내주었다.

그 후 길재는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와 금오산 아래에 머물렀다. 길재가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 숙제의 형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채미採薇라고 명명한 것이다.

정몽주의 문하에서 공부했다더니 역시 스승과 다르지 않다. 높은 자리라면 제 주제도 모르고 덥석 받아먹었다가 청문회를 거쳐 토해내는 요즘 인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3은의 한 사람인 야은 길재는 조선 4대 왕 세종이 즉위한 뒤 그의 충절을 기리는 뜻에 그의 자손에게 관직에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해서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들이 줄을 이었다.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길재의 학맥을 이었다.





이른 새벽 허공 떠돌던 물 알갱이

바위 비탈 잔가지에 들러붙어 꽁꽁 어는가 싶었다.

아침나절 골에 수북이 고인 안개마저

얼음가지에 얹히더니 볼품없는 바위벽은

축축히 젖고 만다.

회색 구름 사이 잠시 얼굴 내민 햇살까지 내려앉으니

눈꽃바위는

봄이 오는 골목길이 된다.

탐방안내소를 들어서서 여유롭게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다. 촘촘하게 잘 쌓은 돌탑들을 우측으로 두고 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을 하게 된다.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15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 바위벽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글씨가 한자 초서체로 암각 되어있다. 금오산 깊은 골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조선 중기의 명필이자 중국 왕희지에 버금가는 초성草聖 고산 황기로가 새긴 글씨인데 각 글자의 크기가 가로, 세로 1m에 달한다. 조선 서예가들 중 김구, 양사언과 함께 초서의 거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율곡 이이의 동생인 이우가 황기로에게 글씨를 배웠는데 나중에 황기로의 사위가 되니 율곡과 사돈지간이 된다.

열네 살에 사마시에 합격할 정도로 천재성을 지녔으나 1519년 기묘사화의 주동인물 조광조의 사사賜死를 주청한 아버지의 허물로 인해 스스로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일찌감치 단념했다. 고향인 선산 낙동강가에 매학정梅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아梅妻鶴子’ 자연에 파묻혀 글씨에 파묻여 일생을 보낸다.

웅장한 기암괴석에 웅장한 초서로 새긴 글씨에서 시선을 거두고 오르자 금오산성을 보게 된다. 고려 시대에 천연 암벽을 이용해 계곡부터 정상까지 이중으로 축성하였는데 외성의 길이가 3.7㎞에 이르고 내성은 2.7km에 달한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내외 성으로도 이용되었다.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한 해운사에 들렀다가 도선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10여 분 좁고 가파른 암벽 통로를 쇠줄을 붙들고 오른다. 길이 7.2m, 높이 4.5m, 너비 4.8m로 표기된 천연동굴은 암벽에 뚫린 큰 구멍으로 대혈大穴이라고도 불렀는데 도선대사가 여기서 득도했다고 한다. 또한 길재가 이 굴에 은거하며 도학道學을 익혔다고 한다.

유학은 외래사상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은연중 가치관의 바탕을 이루면서 우리나라 문화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주자학으로 불리는 새로운 유학으로서의 도학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말 충렬왕 때였다.

중국 송 대의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이 고려 말기에 들어온 이래 조선 때 조광조와 이율곡이 도학 정치를 통한 차원 높은 도의 국가를 실현하고자 하면서 사상과 문화의 초석으로 작용하였다. 불교의 종교 이념과 달리 높은 형이상形而上의 높은 정신적 진리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현실이 담긴 유학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은 본래 현실적 학문으로서 주로 윤리·도덕·정치·교육 등 실제적인 생활면에 응용되어 왔는데 현실을 중시하는 유학의 특성은 도가나 불가로부터 세속성을 벗어나지 못한 비속한 교설敎說로 비판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었다. 그 깊이가 한도 끝도 없는 도학에 빠져있다 보니 머리가 지끈해져 엉덩이를 툭툭 털고 다시 길을 나선다.




금오산 명소 중의 한 곳으로 이름난 도선굴은 실제로 도학이 지니는 실제 의미를 떠나 이곳에서 바라보는 구미시 일대의 전경이 더욱 그 가치를 높인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다시 고도를 높여 대혜폭포에 도착하자 많은 산객들이 거기 모여 폭포의 운치를 즐기고 있다. 금오산 대혜골에는 임진왜란 당시 아홉 개의 우물九井과 일곱 개의 못七澤이 생겼었는데 거기서 형성된 높이 28m의 폭포로서 대혜골 중간지점쯤인 해발 400여 m에 위치하고 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강한 위력이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폭포 위에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대혜담이란 조절지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는데 이 물이 구미지역 용수공급에 큰 혜택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대혜大惠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할딱고개라고 불리는 구간을 오르게 된다. 그 명칭답게 경사 급하게 고도를 추켜올린다. 허리를 잔뜩 굽혀 할딱고개를 올라와 돌아보는 칼다봉 쪽 짙은 갈색의 기암절벽과 바위 능선이 다른 산들의 암벽과 달리 무척 이채롭다.

image93.png 할딱고개에서 보는 칼다봉 쪽의 단애가 이채롭다
32. 정상 일대가 가까이 다가왔다.jpg 금오산 정상 일대가 더욱 가까이 보인다


금오저수지와 그 뒤로 구미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할딱고개를 지나면서는 더 급한 오르막길이다. 암봉에 자리한 오형 돌탑이 뚜렷이 보일 즈음 호흡이 거칠어진다. 오래전이지만 아주 힘들게 오른 적이 있던 금오산이다. 등로가 잘 닦여진 지금도 가파르긴 마찬가지다.

금오산 정상부에 해당하는 금오산성의 내부는 경사와 기복이 완만하여 넓고 평탄한 지세를 보인다. 일컬어 고위평탄면이라는 곳이다.

역시 최고봉인 현월봉(해발 976m)과 약사봉, 보봉을 포함한 정상 일대는 널따란 분지를 이루며 그 아래로 칼날 같은 절벽들이 솟구쳐있다.

현월봉에서 바라보는 먼 거리의 조망은 시계가 흐려 선명치 않지만, 지척의 약사암과 돌탑 전망대는 멋지고도 아찔한 모습을 보여준다. 구미시 일대를 내려다보니 거기서 올려다보는 구미산은 시민들 삶의 일부이며 위안으로 작용할 것처럼 느껴진다.


33. 약사봉과 약사암의 멋진 조화로움을 보게 된다.jpg 약사봉의 품에 안긴 약사암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오형 돌탑 앞에서 숙연해지고 만다


다시 약사암 갈림길로 내려서서 양옆의 바위 봉우리를 담장 삼은 동국 제일문을 통과한다. 계단을 내려서서 거대한 약사봉을 등진 약사암에 이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인 약사암은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의 유적은 현존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된 약사전이 중심 법당이지만 현수교 너머의 범종각에서 홀로 참선도량의 수행에 임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해탈의 경지에 이를 것만 같다. 천혜의 장소에서 명금폭포의 울림을 듣고 저녁놀에 나는 황금빛 까마귀를 보노라면 다른 그 무어가 뇌리에 들어차겠는가.

다시 길 따라 오형 돌탑으로 향하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의 토목건축기술에 혀를 내두르다가 울타리 오른쪽이 낭떠러지인 급사면 등로를 내려서서 자연암벽에 새겨진 4m 키의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90호)과 만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돌탑을 보게 된다.


“손자인 형석이가 하늘로 떠난 후 10년 동안 극락왕생을 비는 마음으로 돌탑을 쌓았지요.”


구미 금오산의 새로운 명소가 되는 여러 형태의 돌탑들을 쌓은 주인공은 70세쯤 되어 보인다. 등산복 차림으로 하산하는 이들에게 사진도 찍어주고 미소로 안전산행을 기원해주기도 한다. 거칠고 험한 산정 가까이에서 돌을 수집하여 혼자 탑을 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 일을 낙으로 삼고 해내고 있다.

약사봉 건너편의 절벽 부근과 보봉에 싸인 돌탑들을 보면 불가사의한 일을 그분은 해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금오산의 ‘오’ 자와 손자 이름의 ‘형’ 자를 따서 오형 돌탑이라 이름 짓고, 짧은 생을 마감한 손자의 명복과 산 찾는 이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돌탑을 쌓는다고 하니 무수히 쌓인 돌탑들을 보면서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산의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애추 지대를 지나면서 내리막이 계속 이어진다. 볼 것 많은 금오산이다. 그걸 느낀 동익이의 한마디가 금오산에서의 하루를 마친다.

보는 것마다 역사와 문화, 전설과 현실 세계가 어울려 공존하며, 많은 것을 가르치고 많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금오산은 다녀와서도 그 느낌이 오래 남는 산 중의 하나이다.




때 / 초봄

곳 / 금오산 공영주차장 - 도립공원 탐방안내소 – 케이블카 승강장 - 대혜문 - 해운사 - 도선굴 - 대혜폭포 - 할딱고개 – 마애불 갈림길 - 현월봉 - 약사암 - 마애불 - 오형 돌탑 – 마애불 갈림길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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