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가 쏘아올린 「폭탄」

「폭탄(爆弾)」, 2025 | 리뷰&해석

by 사각예술

Music | 2026.03.29 Written by 사각예술


죽거나 살거나, 0과 1의 선택지 안에는 역설적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기대거나 자조하는 ‘운명’은 폭탄의 기폭장치처럼 눌리거나, 눌리지 않거나 둘 중 하나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요? 혹은 타이머처럼 언젠가는 0이 된다는 것 외에는 운명이 아닌 걸까요?


세계를 모두 갈아엎을 거대한 폭탄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이것이 터진다면, 폭발로부터 드러나는 것이 많을까요? 혹은 더 깊은 곳으로 사라질 것들이 많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런 폭탄의 기폭장치를 쥐고 있다면, 무엇을 목적으로 둘 것인가요? 모두가 외면하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죽여 깊은 땅 속으로 가라앉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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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ImageP7pWuY.heic 주인공 '루이케'

「폭탄」: 나가이 아키라 감독 / 사토 지로, 야마다 유키 외

일본 / 서스펜스, 스릴러 / 137분



목차﹁

I. 진인사대천명

II. 과연 '테러'일까?

III. 아쉬운 점




I

진인사대천명

줄거리


tempImagePia8zC.heic 지리는 연기

영화 「폭탄」 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경찰서에 잡혀 온 한 주정뱅이가 도쿄에서 벌어질 연쇄 폭탄 테러를 예고하며 시작됩니다.


제가 좀 촉이 좋은 편이어서요. 아키하바라에서 곧 일이 터질 것 같은데요.


신원 불명, 동기 불명. 자신을 “스즈키 다고히코”라고 소개하며 시종일관 스스로를 낮추어 형사들을 대우하는 박색의 노숙자.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비웃어 넘기던 형사 토도로키. 그러나 스즈키의 예언대로 아키하바라에서 폭발 사건이 벌어지며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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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하바라 1차 테러와 형사들의 움직임

이후로 토도로키를 포함한 루이케, 키요미야 등 여러 베테랑 형사들이 스즈키를 심문하며 그의 자백을 받아내고자 하지만 헤실헤실거리면서도 속내를 알기 어려운 스즈키를 상대로 고전하는데요. 엄청난 언변과 상대의 심리를 농락하는 두뇌. 또 어린아이처럼 퀴즈를 내는 그의 모습은 더욱 소름 돋게 연출됩니다.


스즈키는 테러에 대한 정보를 교묘하게 꼬거나 거짓을 섞어 흘리며 인명경시, 위선, 생명의 무게 등을 시험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이중성, 욕망 등 영화의 흥미를 이끌고 가는 의문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tempImageGNraYn.heic 굴종조차 상황적 변수로 사용하는 스즈키

여러모로 한국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생각나는 시놉시스인데요.

평온한 하루 중 남들이 보잘것없다고 무시하던 의문의 남성이 폭탄 테러를 예고한다.

다만 다른 점은 「폭탄」의 경우 ‘폭탄 테러’가 주는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 요소보다는 스즈키와의 대면을 통해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방식을 조금 더 지향하는 듯했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사람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마치 세상의 심판자인 양 구는 스즈키에게 해당되는 말 같기도 하지만 사실 “미리 절망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자”는 뜻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tempImagegJPH1h.heic 발암캐일줄 알았는데 꽤 멋있었던 키요미야 형사

작 중 형사들도 살펴볼까요. 영화는 자연스레 형사들과 스즈키의 대립구도로 이어지지만 꼭 취조실만이 아닌 현장에서 발로 뛰는 이들, 자신의 위치에서 고뇌하는 이들 등 궁극적으론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한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키요미야는 스즈키의 퀴즈를 풀다가도 급한 마음에 스스로 함정에 걸려 사건 해결을 지체시키는가 하면 이세는 사건의 단서를 수사팀에게 숨기기도 하는 등 그들은 서로 간의 입장 차이로 제로 섬 게임, 그 이하의 상황까지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다만 중요한 점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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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경들의 이야기도 재밌다

어쩌면 시시해져버린 스즈키가 입을 닫고 폭탄이 모두 터져버리길 기다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형사들은 각자의 신념과 사정을 기준으로 테러를 막으려 분투합니다. 결과에 상관없이요. 이를 뒷받침하듯 결말부 형사들의 태도는 일관적입니다.


“그럼에도 난 도망치지 않아.” - 루이케
'난 이 불합리한 세상이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토도로키
“책임을 질 뿐이다.” - 키요미야


동료를 해한 범죄자를 죽이려던 코다도, 의도치 않게 하세베 일가를 망가뜨린 토도로키도, 출세욕에 스즈키와의 정보를 숨긴 이세도, 자만하다 패배한 루이케와 키요미야도.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흘러가며 위기를 맞이한 인물들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다가오는 하늘의 뜻이자 대태러의 골든타임을 두고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정말 신의 변덕과도 같은 '사건 종결'을 기다리면서도 그에 쉽게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진정한 인간성을 돋보이는 이야기인 것이죠.



II

과연 '테러'인가?

메시지


화가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이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tempImageQQ1SQ9.heic 성 마태오의 소명

해당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태오를 부르는 장면을 담은 것으로, 인간의 삶에 개입한 신의 장엄한 권능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요.


이는 분명 영화의 취조 장면들을 연상시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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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노숙자로 살던 사람이 형사들을 농락할 정도의 지능과 언변을 갖게 된 걸까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이유였다면 어째서 어린 아이처럼 형사들과 놀고 싶어 하는 걸까요?


「폭탄」의 가장 큰 특징은 '테러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계기는 있지만요) 스즈키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노숙자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는 제시되지 않는데요. 그는 이해 가능한 인물이라기보다 설명되지 않는, 혼돈에 가까운 존재로 남습니다.


만약 이게 의도된 것이라면요?


이러한 성격은 '햇빛'을 통해 더욱 강조됩니다. 밤에 시작된 사건은 아침으로 이어지고, 취조실의 햇빛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죠. 특히 취조실에 이렇게 해가 잘 들도록 창문이 있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내부까지 깊게 들어오는 빛은 실제 공간이라기보다 상징처럼 기능하며, 스즈키를 인간 이상의 존재처럼 보이게 만드는데요.


tempImageyPslad.heic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영화 속에서 햇빛을 등진 채 의기양양하게 앉마 있는 스즈키의 모습 역시, 마치 모두를 내려다보는 존재처럼 연출됩니다. 즉 영화는 단순히 테러범의 '왜'를 파악하고 체포하려는 범죄 영화라기보단, 혼돈과도 같은 미지의 존재의 심판 아래서 인간들의 몸부림을 표현한 군상극인 것이죠. 스스로 얘기했듯 ‘변덕스러운 하늘’ 같은 존재인 셈입니다.


영화의 결말부, 자신을 세상에 각인시키고 싶었던 스즈키는 마지막 폭탄을 터트리지도, 찾게 두지도 않습니다.


마직 마지막 폭탄은 발견되지 않았다.

루이케의 말은 이를 매듭짓는 결말이 되는데요. 그것이 실제 폭탄이든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 둔 두려움이든 말입니다. 중요한 건 폭발의 섬광과 닮은 햇빛은 다음날 아침에도 모든 시민들의 거처에 드나들 것이라는 거죠.


스즈키가 사람들의 운명을 정했던 그날처럼요.



III

그러나!

아쉬운 점


그러나! 영화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앞서 스토리라인과 주제의식을 설명하긴 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출이 산만합니다. 이마저도 후반부에서는 점점 힘을 잃어 살짝 지루해지기도 했고요. 번역의 문제일 수 있지만 스즈키의 대사들이 너무 문어체적이고 직관적이지 않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신들린 연기로 살려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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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캐릭터가 너무 많고 또 그들 모두에게 부여된 서사가 좀 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8부작 드라마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부분입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불명예하게 직위해제 된 하세베 유코. 그와 가까운 동료 사이였던 토도로키. 공로 가로채기 건으로 이세와 껄끄러운 순경 야부키. 그리고 야부키의 절친한 파트너 코다 등...


각각의 이야기가 흥미롭지만, 하나의 영화 안에서 모두를 충분히 담기에는 다소 과한 구성이죠. 이로 인해 취조실 중심의 이야기와 현장 수사가 병렬적으로 전개되지만, 어느 한쪽에도 몰입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습니다.


tempImageJHu0Ks.heic 나르시시스트 설정만 뺐어도..

캐릭터 설정 역시 일부는 클리세를 답습합니다. 특히 루이케는 전형적인 '자기애성 천재'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며, (킥킥, 나란 놈이 살기엔 세상은 너무 바보군) 그 존재 의미나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데요. 오히려 보다 절제되고 대비되는 인물(키요미야 등)이 중심축이 되었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잘 끌고 가던 서스펜스를 갑작스레 인간의 선택과 책임으로 확대시키며 클리셰적이고 다소 평이한 교훈으로 마무리된 결말까지. 한국에 신파가 있다면 일본에는 인간찬가가 있구나.. 라는 느낌이랄까요.




전체적으로「폭탄」은 전형성과 흐릿한 결말이라는 약점이 있음에도, 중반부까지의 서스펜스와 독특한 문제의식을 통해 충분한 긴장감을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특히 요요기 공원 테러 시퀀스는 정말 백미였죠. 영화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와 그 앞서 흔들리는 인간들을 대비시키며 다양한 사회 문제, 인간의 이중성, 또 그럼에도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다루는데요.


tempImageRY3u70.heic 매력있는 여성 캐릭터였던 코다

하루를 살았다는 건 우리가 놓친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당연해지고, 그것에 속아 많은 걸 잊어버립니다.


정말로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중요한가요?

더 안타깝고 슬픈 죽음이 있지는 않았나요?

소외된 자들은 말 그대로 소외되었기에 외면되어야 할 수밖에 없나요?


또 영화 속 폭탄의 뇌관이 된 사람들의 '무관심'처럼 분투하거나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게 되거나. '먹고살기 바쁘니' 둘 중 하나로 이어져야만 하는 걸까요? 그렇기에 영화가 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되. 최선을 다하는 데에 망설이지 말고 결과 절망하지 않는 자세인 것입니다.


이는 직장에서도.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이겠죠.

설령 그게 폭탄 테러를 막는 일이라고 해도요.


'언제 터질까'가 아닌 '언제부터 모르고 살았을까'
★★★ - (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