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리」, 1999
아무리 끔찍하고 외로워도,
다들 자신의 머리로는 납득이 되잖아요. 그렇죠?
1999년 작품 「리플리」는 「본 시리즈」로 익숙한 맷 데이먼과 「가타카」로 원조 미남 이미지를 공고히 한 주드 로가 주연을, 이미지 연출과 미장센이 강점인 안토니 밍겔라가 마이크로폰을 잡았습니다.
「리플리」는 우연찮게 빌려 입은 프린스턴 대학 재킷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며 주연들의 연기와 감독의 강점인 미술적 연출이 잘 어우러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정식 병명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멈출 수 없고, 또 자신이 한 거짓말들과 현실을 혼동하는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신조어도 본 작품 이후로 국내에 일파만파 퍼진 사례가 있죠.
여러모로 같은 미남 배우 동기이자 또 다른 연기파 배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거짓말을 덮는 거짓말을 쌓아가며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자신의 휘황찬란한 가면과 유약한 자아를 철저히 구분했던 프랭크와는 달리, 「리플리」의 주인공 톰은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믿어버리면서 자아에 혼동이 오게 됩니다.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데요. 마치 파쇄기에 넣은 종이처럼 묘사되는 매력적인 인트로를 시작으로 톰의 거짓말은 시작됩니다.
톰은 평범한 청년입니다. 피아노 조율사와 호텔 보이를 오가는 삶. 아파트는 허름하고 사방에선 남녀가 싸우는 소리가 매일같이 들려오며 차려입을 만한 브랜드 수트도 없습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도, 고급 호텔의 사장도 될 기회가 없었던 톰은 부자들의 연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치다 선박사의 사장인 그린리프 1세와 인사를 하게 되는데요. 별 볼 일 없던 톰과 상류층 부자인 그린리프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톰이 걸치고 있던 프린스턴 대학 재킷 때문이었습니다.
톰은 사실 잠시 빌려 입었던 것이지만 그린리프는 자신의 아들, 디키 그린리프와 프린스턴 동문이라고 착각하고 말을 걸게 되죠.
톰은 그 자리에서 해명을 해도 충분했습니다. "실례합니다만 전 프린스턴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이 재킷은 잠시 빌려 입었습니다. 아드님과는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라고요. 그러나 왜인지 톰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요.
디키는 잘 지내죠?
톰이 건실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던 그린리프는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 없이 타지에서 한량처럼 사는 디키를 데려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성공 보수로 1,000달러를 약속받은 톰은 그의 부탁을 받아 모든 경비까지 공짜로 이탈리아에 가게 되는데요.
뜨겁지만 기분 좋은 햇살, 시원한 바다. 음유시인과 여유로움이 넘치는 곳. 톰은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디키를 만납니다. 그의 오래된 여자친구 마지도 함께요.
톰은 매력적인 미남인 데다가 썩어 넘치는 돈, 앞으로의 삶을 걱정할 필요 없는 삶을 가진 디키와 친해지며 점점 자신도 그 여유로움에 도취되기 시작합니다.
디키의 아버지에게 거짓말로 편지를 써가며 톰은 뉴욕으로 돌아갈 날을 유예합니다. 디키는 자신을 안다며 같은 프린스턴 출신이라고 인사하는 톰을 처음부터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당연히 초면인 사람을 기억할 수도 없었지만 재즈라는 공통 관심사,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톰을 집에 들이며 시간을 보내죠. 그러나..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기까지 한 톰은 점점 디키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연모하기도 했고, 또 디키와 함께 하는 시간에서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여유와 평안을 놓칠 수 없었는데요.
우린 서로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분명 어딜 가든 나를 데려갈 거라고 굳게 믿었던 리플리는 그린리프 1세와 했던 계약의 만료가 다가옴과 동시에 다시 돌아가야 할 비루한 뉴욕의 삶이 떠올라 불안해집니다.
한 편 동성애는 고사하고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발 걸치고 다니는 플레이보이,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디키는 톰을 점점 불편해합니다.
어딜 가나 따라오고, 어딜 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톰의 존재에 조금씩 거부감을 느끼고 이내 자신은 중북부로 떠날 것이라고 작별을 고하며 두 사람은 그간 없었던 큰 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던 작품 「캐치 미 이프 유 캔」 역시 주인공인 프랭크가 결국 검거되며 거짓된 삶에 막을 내리지만, 결국 수사관인 칼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FBI에서 일하게 되는 등 이를 부정적으로 그려내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가족의 붕괴로 큰 상처를 받은 프랭크는 무작정 뛰쳐나가 자신의 유약한 소년의 자아를 간직한 채 사기를 치고 다니며 아버지에게 거짓된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 중 진실이라곤 아버지를 향한 프랭크의 사랑과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을 붙잡고 싶은 마음뿐이죠. 그럼에도 프랭크의 상처받은 영혼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며 관객으로 하여금 거짓말로나마 상류 인생을 즐기는 프랭크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반면 「리플리」는 완벽한 비극입니다. 톰은 경찰에게 검거되지도,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지만 이미 거짓말을 가리기 위한 더 큰 거짓말들이 수북이 쌓여왔고, 또 그를 지키기 위해 디키를 포함한 살인도 여러 번 자행했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자아조차 스스로 했던 거짓말과 혼동하게 됩니다.
우리는 톰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없습니다. 그가 톰이 아니게 되는 시점부터요. 톰은 그저 건실하고, 부유하진 않지만 매너가 있으며 재주도 있는 잘생긴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을 일삼다 스스로를 잃어버려 자신을 버리려는 디키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 디키의 친구들인 프레디와 피터까지 계획살인하는 등
갈 데 까지 가버린 인면수심 범죄자답게 표정 변화 없이 그린리프 1세에게 돈을 받아내어 디키의 명의로 집을 계약하기까지 하며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는데요.
원하지 않음을 넘어 돌아갈 수 없는 톰의 삶, 그리고 앞으로도 디키와 함께 하던 시절 누리던 여유와 평안을 지키기 위해 불안과 도망으로 점철된 거짓말을 계속 해나야 하는 비극적인 삶을 보여주며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거짓말은 중독적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언행 중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TPO(Time - Place - Occasion)가 필요 없기 때문인데요.
어릴 적 학원을 땡땡이치고 피시방을 갔다는 작은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시간을 거짓말하고, 친구 이름을 팔며 결국 친구 부모와 삼자대면하게 되는 경험이 한번쯤은 있습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며 이 같은 안전장치는 순전한 신뢰로 보장되고 결국 거짓말 자체가 신뢰를 깨뜨린다는 아이러니를 갖고 있지만요. 들키지 않았으면 나한테 사과 안 했을 겁니다. 들키지 않았다면 스스로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때로는 치장용이던 가면이 나를 보호하게 되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오래도록 착용하고 있다 보니 피부인 줄로만 알기도 합니다. 살가죽처럼 이제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톰의 행동처럼 말입니다.
「리플리」의 첫 장면 첫 대사는 이렇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지우고 싶다.
「리플리」는 좋은 작품입니다. 인물의 감정을 유려하게 표현하는 감독의 연출과 아름다운 이태리의 색감, 그들의 여유로움이 묻어 나오는데요. 맷 데이먼과 주드 로의 연기 역시 뛰어나며 점점 자신의 거짓말에 잡아먹혀가는 톰의 인격의 미세한 변화는 소소한 관람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섹시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지만 어딘가 곧 끝나버릴 평화의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맷 데이먼의 「My Funny Valentine」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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