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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르 북티크

인생은 용두사미로

「노인과 바다」, 1952

by 사각예술

Intro


노인과 바다 Playlist by HANSUL


우리는 무無에서 태어나 무無로 돌아갑니다. 필연적인 죽음으로 향하는 '인생'이란 누군가에겐 기회의 순간으로, 또 누군가에겐 허무한 고통이 되어버리는데요. 정말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니까요.


반면에 공허함 뿐인 인생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추구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끝없이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과 후회,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내 웃음 짓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 낚시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꼬아서 했나요? 잡으면 대박이요, 못 잡아서 공치면 라면으로 때워야 하는 망망대해의 법칙. 대어 인증샷을 남기리라는 소명을 이루기엔 너무 지루하고 피로하잖아요.


그럼에도 낚시를 좋아하던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낚시는 인생 그 자체다

정말 그런가요? 노를 젓고 나아가 힘들게 잡아 올린 게 해초 몇 가닥과 삼선 슬리퍼, 기스가 가득한 안경이라면 어떤가요? 이 먼바다까지 나온 시간과 체력, 교통비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찔해지죠. 그렇다면 삶이란 누군가에겐 용두사미일 뿐인 걸까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양반이 한 명 있긴 합니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는 얘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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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1952

●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자 최고작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노인과 바다」입니다. 작품은 가난하고 늙은 어부가 '대어'를 낚기 위해 망망대해 위에서 벌이는 사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어딘가 예능프로 '도시어부'의 시놉시스를 보는 것도 같지만 헤밍웨이가 이 작품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인생, 삶의 태도를 관통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문체가 독자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서사의 흐름을 만나 주인공의 고난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강한 흡입력을 가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읽을수록 '예수'의 이야기가 떠오르는가 하면 신화적일 정도의 강인함을 보여준 노인의 모습에서 스스로의 나약함을 확인하기도 했죠.


헤밍웨이.jpeg
최근작인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준 서사 기술의 완벽함과 현대적인 스타일을 구사한 공적이 있다.

- 노벨문학상 수상 평론





I

월척이오!

· 줄거리


앞서 설명했듯 주인공 '산티아고'는 늙은 어부입니다. 바다에서 떠다녔던 시간들을 증명하듯 물고기 잡는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었지만, 어째선지 그는 무려 84일째 아무런 수확이 없었는데요.


급기야 마을에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는가 하면 그의 친손자와도 같은 조수, 소년 마놀린의 부모는 더 이상 마놀린을 산티아고의 배에 타지 못하게 했죠.


산티아고는 결국 '온 마을이 놀랄 대어'를 잡아오겠다며 무척이나 고독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낚시를 홀로 나갑니다.


2.jpeg 대어를 낚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이번에도 빈손으로 돌아가나 했던 그는 그동안 본 적 없던 거대한 크기의 청새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산티아고는 생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무시도, 나 자신에 대한 의심도, 마놀린에게 끼친 걱정도 해결할 수 있을거야."


하지만 이때는 몰랐습니다. 그의 인생 중 가장 험난한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요.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미끼를 먹는 것도, 낚싯줄을 끌고 가는 것도 꼭 사내답게 하는군.
싸울 때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단 말이야.
저놈(청새치)에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필사적일 뿐인 것인가?


산티아고는 낚싯대를 온몸에 고정한 채 청새치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며 며칠간 끌려다니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손바닥을 깊게 다치거나 채찍에 맞은 듯 등판이 낚싯줄로 너덜너덜해지기까지 합니다.


sharks.jpg 紅海

부실한 음식과 쪽잠으로 버티며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던 그는 마침에 청새치를 죽여 겨우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고기를 손에 얻게 됩니다. 하지만 마을로 돌아가던 길에 피냄새를 맡은 상어들과 피할 수 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데요.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인은 키에서 손잡이를 잡아 빼어 두 손으로 움켜쥐고 닥치는 대로 마구 후려갈겼다. 그러나 상어 떼는 이제 이물 쪽으로 몰려가서 한 놈씩 번갈아, 또는 한꺼번에 덤벼들어 고기를 물어뜯었다.


청새치는 고사하고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했던 노인은 상어들을 물리치며 마침내 성한 곳 하나 없는 몸으로 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산티아고에게 남은 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따라오는 가난과 상어가 이미 뜯어먹어버린 청새치의 뼈뿐이었는데요.


edning.jpeg 머리만 남아버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의 여정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다음날 나가야 할 낚시를 태연하게 준비하며,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작 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자 꿈'을 꾸죠.




II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거야

· 작품의 메시지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헤밍웨이의 문체를 두고 간결하고 하드보일드하다, 라고 이야기했지만 동시에 「노인과 바다」는 몇몇 비현실적인 요소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plat.jpeg 한국에서 연극화된 작품
우리의 삶은 넓은 바다 위 조각배처럼 위태롭고(산티아고의 인생) 대체로 불운(상어 떼)이 따르지만, 희망(청새치)과 소명(어부)을 간직한 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해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이다.


노인의 몸으론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며칠 간의 표류, 오늘날을 기준으로도 기록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초거대 청새치(5.5미터), '8줄의 이빨'을 가졌다고 표현된 상어 등 각각 고단한 인생과 불현듯 사라지고 나타나는 보상과 불행을 은유하는데요.


따라서 이는 그가 겪은 사건들의 불가항력을 표현함과 동시에, 극한의 정신력과 자기 주체성을 버리지 않는 산티아고의 강인한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죠. 얼핏 보면 '용두사미'처럼 보이는 그의 여정을 작품의 메시지와 일맥상통시키면서요.


boy.jpg 두 사람의 우정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뼈만 건진 산티아고의 여정은 결과의 허무함과 과정의 창대함의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해 준 것이 역설적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청새치를 잡겠다는 자신의 소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기 때문이죠.


만약 산티아고가 마놀린 없이 낚시를 나가지 않았다면?

며칠간 끌려다니다 제풀에 지쳐 청새치를 놓아줬다면?

상어 떼에게 공격받던 청새치를 버리고 도망쳤다면?


산티아고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일련의 IF들은 사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태도로 연결됩니다. 어쩌면 위의 경우의 수 중 하나라도 선택했다면, 그는 덜 피로하고 다치지 않았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아도 되었겠죠.


노인과_바다14.jpg

그러나 어부로서 고기를 포기한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공포에 굴복하고 도망친 자신에게 실망한 채 결말에서 보여주던, 다음 낚시를 준비하는 초연함과 산티아고의 용맹한 정신세계를 은유하는 '사자 꿈' 역시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산티아고의 여정은 여든다섯 번째 실패였던 걸까요? 파멸을 불사하며 패배하지 않기 위해 저항했던 가난한 어부의 삶은 마찬가지로 여러 시련을 겪는 우리에게 큰 여운을 주고 있지는 않나요?


Like Christ, to whom Santiago is unashamedly compared at the end of the novella, the old man’s physical suffering leads to a more significant spiritual triumph.
(마치 그리스도처럼, 소설의 최종장에 이르러 산티아고의 육체적 고통은 더 깊은 영적 승리로 이어진다.)

- 「노인과 바다」의 캐릭터를 분석한 에세이 中




다양한 방식의 해석, 또 이 글에서 다 꺼내지 못한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노인과 바다」는 분명 걸작입니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오래 정착하기도 했던 쿠바 해변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동감 있게 담아냄과 동시에 만성적인 우울감과 고뇌를 표현하고 곧 위트와 강인함으로 해소하며 작품을 꾸몄는데요.


노인이 자주 언급하는 하는 스포츠 '야구'처럼, 홈(안식처)을 떠나 먼 길을 돌아서 다시 홈으로 돌아오면 1점 나아가게 되는. 크게 봤을 때 인간의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같죠.


본래 노벨 문학상은 단일한 작품에 수여하는 상이 아니지만, 그를 향한 평단의 찬사에서 볼 수 있듯 「노인과 바다」 세계 소설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가장 첫 줄에서 "無에서 태어나 無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많은 작가들이 얘기하듯 헤밍웨이는 이 두 無를 팽팽히 잇는 삶의 과정을 두고 누구나 거쳐가는 '노년'과 누구나 갈구하는 '희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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