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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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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1922

by 사각예술

Intro


상현의 기도 - 조영욱


작가 mrsiraphol 출처 Freepika.jpg by mrsiraphol

부처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시끄러운 SNS 알림, 바닥난 통장 잔고, 연인과의 말다툼… 이런 속세의 번뇌를 떠나 조용한 절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는 삶? 해진 옷을 걸치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파하며 돌아다니는 수도자의 모습?


독일 태생으로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 자란 헤르만 헤세는 1922년 소설「싯다르타」를 발표하며 그런 낭만적 환상을 깨뜨립니다. 종교철학 · 정신적 성장을 담고 있는 본 작품은 1차 세계대전과 우울증을 겪은 그의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들어 고통과 쾌락이 들끓는 세상 속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큰 위로와 삶의 태도를 제시하는데요.


하지만 저를 포함해 그런 깨달음을 구도求道하는 마음으로 책을 편 사람들과, 이 글을 읽으려 들어오신 사람들에게, 작가 헤르만 헤세는 겸손한 자세로 말합니다. — '진정한 열반에 들고 삼라만상의 진실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 중요한 조건 하나가 있다고.


사실 가장 왕도적인 방법은… 지금 뒤로 가기를 누르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I

사랑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

· 싯다르타의 여정



killing-happiness-friedrich-ani-in-conversation-with-naveen-kishore-2-formatkey-jpg-w1920.jpg Hermann Hesse

「싯다르타」의 중심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진리에 대한 탐구욕에 불타던 청년, 싯다르타가 여정을 떠나
여러 시련을 겪으며 마침내 완전히 해탈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난 '완성된 자'가 된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브라만 계급에서 태어나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인품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는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는데요—말과 가르침, 단식과 사색으론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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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궁금증이 아닌, 싯다르타의 존재를 흔드는 근본적인 번뇌였습니다. 단식과 명상으로 무(無)의 경지를 경험했지만, 그는 자아로부터 잠시 도망칠 뿐 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되죠.

단식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마비시키는 것뿐이야.
이는 소몰이꾼도 여인숙에서 쌀막걸리 몇 사발이나 잘 발효한 야자유를 마시고 취하면 겪는 일이네.


결국 그는 풍요롭던 환경을 떠나, 진리를 찾기 위한 고행과 순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수도생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생 카말라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카와스와미라는 사업가와 어울리며 탐욕 속에서 부를 축적하고 지독한 속세를 경험합니다.


Siddharta.jpg 영화에서 표현된 두 사람

또 카말라가 낳은 자신의 자식을 재회하게 되지만, 그 관계조차 마찰이 가득하여 싯다르타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경험이 되죠.


그러나 싯다르타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 속에서 번뇌를 느끼면서도 그것 또한 진리를 향한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평생 경멸해 왔던 세속의 세계 역시 깨달음을 위해 '필요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하며 딱히 신성하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지만 삶의 조화를 이루어나가죠.

zzzohmy_339834_14[583882].jpg 苦行

결국 그는 강가에서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소박한 삶을 살며, 강물의 흐름 속에서 진리를 목격합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흐르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같은 '강'인 것처럼, 과거·현재·미래가 하나로 이어지고,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선과 악이 모두 같은 흐름 안에 있다는 통찰은 그에게 열반의 경지를 선사합니다.


그는 말없이 앉아 미소 지으며 깨닫습니다. 우주와 모든 중생의 자아는 연결되어 있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몸소 체험하며 싯다르타는 세상 삼라만상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죠.

진리는 찾거나 쌓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체험하는 것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죽음이 있듯이, 도둑의 마음에도 부처가 있고, 돌멩이마저도 진리를 품고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길은 가치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곧 깨달음이며, 차별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이야말로 열반에 이르는 문이다.


갈구하는 자에게는 갈구하는 것 외에 보이지 않고,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눈에는 자식의 용기가 보이지 않는 법.


싯다르타는 그렇게 완성된 자가 됩니다. 부처가 되려는 자가 아닌, 이미 부처였음을 자각한 자로서.




II

지식과 지혜

· 헤르만 헤세의 조언



forthebetter.jpg 어허

조금 전 싯다르타의 여정과 그로부터 얻은, 그리고 작가가 얻은 것이기도 한 깨달음을 우리는 전달받았습니다. 그러나 작 중 내내 싯다르타의 태도로, 또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들의 모습으로 강조되는 것이 있는데요.

그러나 나는 말은 사랑할 수가 없네.
가르침은 아무런 단단함도, 부드러움도, 색깔도,
가장자리도, 냄새도, 맛도 갖고 있지 않아.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오랜 벗 고빈다에게 싯다르타 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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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싯다르타의 말은 함께 여정을 떠났지만 다른 길을 걸었던 그의 죽마고우, 고빈다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유와도 같습니다. 질문을 한번 던져 볼까요?

가르침에 배움은 항상 따라오는 것인가?


싯다르타의 여정은 진리를 찾아 나가는 여정이기도 했지만, 말과 가르침을 거부하는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고향의 아버지와 현인들의 가르침, 늙은 사문의 가르침, 세존 고타마의 가르침 등.


다만 싯다르타는 배웠던 것이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으로부터 말입니다. '알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앎을 방해한다'라고 말하던 그는 말과 글로서 주물러진 지식이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주입당하는 걸 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스스로 고찰하고 깨닫고 행동하는, 설령 자신에게 전달된 말과 지식이 있더라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다시 곱씹어보고 해석하고 소화한 채 스스로의 지혜로 탈바꿈하는 자세가 그를 열반에 들게 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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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글자와 말 뿐인 소설 「싯다르타」와 이 리뷰글 역시도 쉽사리 깨달음을 체험시켜주진 못할 것입니다. 지식은 전달되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다는 싯다르타의 원칙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니까요.


제목에선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결국 작가가 전달한 위로와 조언 역시 우리 스스로 사색하고 소화한 뒤 삶 속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Intro에서 '가장 왕도적인 방법은 사실 뒤로 가기를 누르는 것이다'라고 한 걸 기억하시나요? 저는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다 읽고 덮은 독자들과 우리들 모두는, 결국 세상을 사랑하고 이해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hotlinebling.jpg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구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동서양 종교철학의 결합과 작가 내면의 탐구를 서양 고전문학의 실존주의로 표현해 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어떤 과업도, 목표도, 소명도 이루지 않지만 결국 부처와도 다름없는 완성된 자가 되었죠. 이는 집필 당시 여러 정신적, 시대적 위기를 겪고 있던 작가가 정신과 치료와 스스로에 대한 고찰, 다양한 영적 경험을 통해 극복했다는 점에서 작품의 진정성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기도 합니다.


분량이 짧은 소설은 아니지만, 삶을 헤쳐나가는 방법의 단서만은 명확하게 가늠할 수 있으니, 한번 읽고 덮어보시고 세상을 사랑해 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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