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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르 북티크

신도 사회도 없는 곳에서

「이방인」, 1942

by 사각예술

Norihiro Tsuru - Last Carnival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적인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등 진화하는 유전자와 고도화되어 가는 지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죠.


동시에 쳬계화되고 도식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인간은 순간순간의 욕망과 감정을 절제하고 사회적 합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번영시켜 왔는데요.


때문에 충족을 유예당하는 우리의 본능적 감각들은 언제나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뭘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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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제각각, 똑같은 참혹함

특히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삶의 터전을 앗아가는 전쟁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때때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자신만의 답을 내려 스스로를 짓누르는 불안을 잠재우기도 합니다.


인류는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가를 불문하고 수많은 예술가들은 실존주의적 철학에 기대어 부조리해 보이는 인간의 삶을 제각각 꾸몄는데요.


*실존주의 철학 : 인간은 본질(목적) 없이 태어나며,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중에는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 짓눌려 잊어가던 욕망들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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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알베르 카뮈 소설 / 노벨문학상 수상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여러 작품에서 인용되고 또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설이지만 진정 이해하기는 실로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대충 부조리문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소설을 읽은 독자에게는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인 소시오패스 주인공의 짧은 일생을 엿보는 것으로 그치곤 하는데요.


다만 시대를 앞서간 구어체 문장들과 상징적인 메타포, 또 당시 전쟁으로 인해 방황하던 유럽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고전소설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I

줄거리

· 뫼르소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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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는 뫼르소라는 남성이 등장합니다.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으로,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그의 특징은 과도하다시피 한 솔직함이었는데요. 너무 솔직한 나머지 뫼르소는 타인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감각과 욕망에 충실하며, 거짓된 것과 허상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의 죽음에도 뫼르소는 그다지 슬퍼하지 않고 그저 '덥다'는 생각을 하거나, 연인 마리에게 욕정을 느낌에도 사랑하진 않는다고 말하고, 우발적이었던 살인에 대해 없는 말을 지어내 변명하길 거부하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그녀(마리)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 53p


결정적인 사건으로서 뫼르소는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이웃친구 레몽과 악의로 엮여있던 한 아랍인이었죠. 붙잡힌 뫼르소는 재판대에 서게 되고, 이는 뫼르소의 말대로 그의 크나큰 불행이 되어버립니다.


L20130105.22014194040i1.jpg 후세 무뇨스의 일러스트

재판 내내 뫼르소는 반사회적이라며 질타를 받습니다. 독자조차 쉽게 이해가지 않는 그의 행동들은 재판에서 그에게 아주 불리하게 작용하는데요. 실제로 그의 형벌을 정한 것은 '우발적인 살인'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의 감각과 욕구에 충실했던 순간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총알들은 깊이 들어가 박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 73p / 친구 레몽과 마찰이 있었던 아랍인을 살해하며
재판장은 나에게, 이제부터 겉보기에는 나의 사건과 무관한 것 같지만, 아마도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들을 다루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또 엄마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렸고… (후락)
- 1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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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것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형 집행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재판에 대한 항소를 거부하거나 자신을 찾아와 '신'의 이름으로 위로하는 사제를 꾸짖는데요. 마지막 부분 사제에게 쏟아내는 뫼르소의 긴 독백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보여주죠.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 141p /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뫼르소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142p


이제 정해진 것은 죽음뿐임을 인지한 뫼르소. 「이방인」은 자신의 불행, 부조리에 대한 진실을 마침내 이해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뫼르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립니다.



II

이방인

· 인간의 욕망



알베르 카뮈

이전 「진격의 거인」리뷰에서도 다룬 주제이지만, 실존주의의 대전제는 '인간의 삶은 몰이해로 가득한 혼돈'이라는 것입니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를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해답이 일치하지 않는 순간'이라고 해석했는데요.


즉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개인의 욕망에 대해 사회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을 때 부조리가 발생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착실히 먹고살던 와중 아무런 이유 없이 살상무기에 목숨을 잃는 전쟁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그 의미가 바로 와닿는 것 같죠.


네가 항상 '정답'을 말하려고 애쓰다 보면, 인생이 시험처럼 돼버리고 말 거야.
난 정답을 내놓으려고 애쓰지 않아. 내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지.
만약에, 때문에, 그래야만 했는데, 할 수 있었는데, 같은 건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인 거야.

- 칸예 웨스트 曰


주인공 뫼르소는 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 사회적 규범과 그로부터 오는 대답에 기대지 않는 인물입니다. 얼핏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려지지만 오히려 '감각적 욕구',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고 움직이는 그는 가장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인 것이죠.


또한 그는 자신의 감각에 충실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을 변명하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오롯이 책임을 지는 인물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죽음으로 단죄하는 재판(사회)이 카뮈가 극화시킨 현실의 부조리인 셈이고요.


이방인은 어디에

물론, 카뮈의 「이방인」은 살인처럼 비윤리적인 행위를 옹호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카뮈는 오히려 이러한 개인의 욕망에 대한 책임을 끊임없이 강조했으며 그 일환으로 사형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뫼르소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뫼르소는 사회가 요구하는 ‘적절한 슬픔’이나 ‘도덕적 후회’ 대신, 자신의 감각과 선택에 충실하며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차갑게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뜨겁고 주체적이며 이는 카뮈가 생각한 개인의 올바른 지향점인 것이죠.


그런 뫼르소가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질문—죽음이기도 합니다.



III

죽음에 대하여

· 모두의 공통된 말로


사진에서 본 그 기계(사형 집행에 쓰이는)는,
무엇보다도 정밀한 제품답게 완벽하고 번쩍이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항상 과장된 생각을 품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은 단순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카뮈가 사형 집행 기계로 은유한 '죽음'


카뮈의 실존주의 철학의 또 다른 대전제는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제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선 빈손으로 가는 법이고 제아무리 겁 없는 자라도 죽음 앞에선 말없이 서성이는 법.


뫼르소는 사제에게 '모든 인간은 특권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특권이란, 죽음을 앞둔 인간이 삶의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를 말하는 것이죠.


사람이 죽기 전 가장 많이 하는 후회 중 하나는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같은 종착지로 올 것을 알았다면, 조금 다르게 살아볼 걸 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ca3844166756269.641d71623022d-826x1200.jpg 어머니의 장례식

뫼르소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 나서야 어머니를 다시 생각합니다. 또 그녀가 죽음을 앞둔 나이임에도 다시 사랑을 시작한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뫼르소의 어머니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비록 노년에 접어들며 양로원에 들어가 아들의 손길은 받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같은 처지에 놓인 벗들을 만났고, 늦은 나이지만 다시 한번 사랑을 했습니다.


「이방인」을 읽으며 다시 돌아봤던 것은, 나는 죽음을 마치 삶의 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예외 없이 같은 질문을 풀기 시작해 결국 같은 답으로 이어지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이미 답이 쓰인 문제에 대해 우리는 점수가 몇 점일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비록 그 '답'이라는 것에 가까이 가본 적도, 손을 대본 적조차 없음에도요.


Nighthawks_by_Edward_Hopper_1942.jpg 개인적으로 많이 떠오른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카뮈의 생각대로 삶이란 문제의 의미는 '푸는 것' 자체에 있는 거라면, 죽음은 답이 아닌 데드라인이 아닐까요? 문제를 풀었건 풀지 못했건, 정석적인 방법으로 풀었던 편법을 써서 풀었건 간에 시험 시간이 다 된 것뿐인 것처럼요.


뫼르소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면, 그가 '모두의 죽음은 같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죽음에도 딱히 슬퍼하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카뮈의 또 다른 대표작이자 이방인과 함께 읽으면 좋은 철학서 「시지프 신화」에는 뫼르소가 신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 모습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는데요.


Punishment_sisyph.jpg 시지프의 모습

신의 형벌로 바위를 굴리는 무의미한 노동을 하는 시지프. 그가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신의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닌, 바위를 굴리는 행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외부적 요인(신의 용서, 현대의 '사회적 맥락')과 상관없이 내가 느끼는 바를 받아들이는 것. 사회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인간이자 부조리를 직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카뮈는 말합니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강인한 태도는, 그 무의미함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 것이라고. 시지프가 바위를 굴리는 순간순간에 집중하듯, 우리 역시 삶의 반복과 고통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다시, 서론에서 밝혔듯 충족을 유예당하는 우리의 감각들은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뭘 위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신의 구원도, 사회의 인정도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부조리를 이기는 인간의 존엄이며, 카뮈가 말한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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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사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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