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일에 푹 빠져 있다. '푹 빠졌다'는 문장의 어감과는 다르게 그리 기분 좋은 시간들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러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시점이 겹치기도 했고, 하필 출장도 많았다. 국내로 해외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사무실을 비우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빨리 처리해야 하는 서류 작업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서 사고도 여러 건 터지면서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더 쉴틈이 없어졌다. 급한 보고건 때문에 미뤄놨던 일들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었다. 미룰 수 있는 건 휴가뿐이었다.
쏟아지는 일들에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는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사람
도대체 내가, 아니 우리 조직이 하고 있는 실무를 이해하고나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 파트장.
가끔 몇몇 과장님들과 부딪히는(어쩌면 다소 일방적으로 욕을 먹는) 모습들을 보면 짠할 때도 있지만, 냉정하게 그가 맡고 있는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현재 상황에 대해 진단을 하지도 못한다. 보고서를 제출하면 몇몇 '어구'들이 내포하고 있는 잠재적(혹은 정치적) 위험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이런 문구는 나중에 문제 생기면 위험할 수 있는데..."
지적만 하고 수정 방향에 대해서는 실무자가 고민해 보란다. 겁만 많고 능력 없는 사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분에게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ppt 문구, 메일 문구를 하나하나 수정하고 있노라면, 내가 엔지니어가 아니라 작가가 된 느낌이다.
도대체 내가 얼마큼의 일을 떠맡아야 만족할지 모르겠는 사수.
파트장님과는 달리 내 사수가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선임자로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과감히 내리고, 그에 대한 책임도 마땅히 진다. 내가 실수했을 때도 "뭐 큰 일도 아닌데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라며 굉장히 쿨한 자세로 위로한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속 시원하게 윗사람들과 부딪힌다. 엔지니어적으로도 스마트하다. 가끔 기발한 생각이나,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도 많다. 여기까지 말하면 참으로 좋은 사수 같지만, 문제는 이 사람이 일하기를 지독히 싫어한다는 것이다.
근 1~2년간 아래에서 후술 할 나의 성향과 맞물리면서 이 사람의 나태함은 극에 달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위의 장점은 치명적인 단점으로도 작용하게 되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전히 결정은 과감히 내린다. 다만 현재 일의 진행 상황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과감히 결정을 내려서, 후폭풍도 그만큼 거대하게 우리를 덮친다. 회사 생활을 하며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함께 일했을 때 생기는 문제는 책임도 함께 진다는 것이다. 이게 참 거지 같다.
여전히 내 실수에 대해서 관대하다. 다만 본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더더욱, 때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가끔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이게 원래 좀 어려워"라며, 스스로를 알아서 위로한다. 나에게 사과조차 없다. 그리고 이때도 역시나 함께 책임을 진다.
여전히 윗사람들과 시원하게 부딪힌다. 그래서 적이 많다. 그렇게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가 아닌 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 와서 부탁하고, 물어본다. 그럼 내가 뻐꾸기가 되어 다시 사수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답을 알려준다. 가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있다.
입사 초반만 해도 그가 너무나 미웠지만, 그것도 정이라고 애증의 시간이 많이 쌓여서 그런 걸까, 지금은 그러려니 하며 지내고 있다. 그는 회사에서 쏟아붓는 열정만큼의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지금처럼 차갑게 식었다고 한다. 회사는 그저 내 몫만 다하면 될 뿐이며, 퇴근 이후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취미와 가족,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그 생각들을 존중한다.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세 살배기 아들과 주말에 행복하게 보낸 시간이 담긴 사진들을 보고 있을 때는, 그가 정말 좋은 아버지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다만 회사에서 그가 짊어진 몫은 왜 내 몫의 크기보다 한없이 작은지, 왜 그가 느끼지 못하는 책임감마저 내가 오롯이 안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다. 왜 나만 내 시간들을 일보다 더 미뤄야 하는지도 말이다.
두 번째는, 나
나는 예스맨이다.
혹시 시간 되면 이거 자료 좀 만들어줄래요? 네 언제까지 보내드리면 될까요?
이거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알려줄 수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진짜 미안한데,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지금 할 사람이 없는데, 이것 좀 맡아서 해줄 수 있나? 네
그래서 팀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다. 불과 올해 초만 해도 그 사실이 기분 좋았다. 내가 이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된 기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자기 효능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달까.
하지만 나도 이젠 회사 생활에 닳기 시작한 것인지, 조금은 비꼬아서 생각하게 된다.
'해달라면 다 해주는데, 당연히 좋아하지. 싫어하면 이상한 거 아닌가? 그거 듣고 좋아서 퍼주면 그게 호구지.'
그렇게 나는 호구가 되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안된다, 싫다'는 말이 잘 안 나온다.
원래 남의 부탁을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도움을 줬을 때에 보람이 큰 것도 있지만, 최근 드는 생각은 그냥 내 자존심 때문에 거절을 못하는 것 같다. 거절을 한다는 것이 곧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될까 봐 두렵나 보다. 다른 사람에게든, 나에게든 말이다.
일례로 나를 가장 자극하는 부탁은 아래와 같은 요청이다.
"지금 이거 맡아서 할 정신없지?"
"이거 쉽지 않은데, 할 수 있겠나?"
그럼 나는 당연히 할 수 있죠.라는 식의 대답을 한다. 하면 되지. 내가 왜 못해?라는 생각을 하며. 이쯤 되면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오기에 가깝다. 결국 나만 손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걸 받아들이는 게 참 안된다.
이런 나의 성향을 바꾸기 위해 이런저런 심리적 요법을 써보았지만, 전에 썼던 글처럼 사람 참 쉽게 안 변하더라. 요즘은 그냥 포기하고 이런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요즘처럼 내 앞가림하기에도 벅찰 때, 그럴 때에도 어김없이 발동하는 '예스맨'기질은 정말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보통 그럴 때 답한 Yes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할 때도 많았다. 나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그 적정선은 꼭 찾아야겠다.
어릴 때 나는 내 가치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겐 냉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젠 이 말이 허상임을 안다. 보통 남에게 관대한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관대하고, 스스로에게 냉정한 사람은 남에게도 냉정하더라. 어쩌면 나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좀 더 관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스스로 되뇌다 보면 지금보단 더 현명하게 삶을 이겨내지 않을까, 삶의 적정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