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금요일 밤의 서울.
금요일 밤의 서울은 아침과는 다른 종류의 생기와 설렘 그리고 그 들뜬 분위기가 아직 쌀쌀한 봄밤의 공기를 감싸고 있었다.
여기저기 흘러나오는 노래, 별보다 반짝이는 네온사인들, 아직 꺼지지 않은 사무실의 형광등, 도로 위에서 물결처럼 굽이치는 헤드라이트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서울의 밤이다.
설희의 대부분의 날들이 그랬듯이 퇴근 후 수영을 만나 술을 마셨다. 괜찮다고, 잘 버티며 살아가다가도 불현듯 불안한과 답답함이 흘러 너무 칠 땐 술을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었을 때는 남들이 부럽지 않은 이유를 경쟁하듯 이야기하다가 우리 어떡하냐는 신세한탄으로 끝나는 썩 유쾌하지 않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요즘 누가 결혼에 목매니?" 수영은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결혼은 미친 짓이야.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서로 구속해 안달이야~" 취기가 돌자 흥이 오른 수영은 흥얼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근데 나 좋다고 목매는 남자가 있어야 결혼에 목을 매든, 사랑에 목을 매든 선택 할거 아니야."
설희는 소주 한 잔을 꿀꺽 삼키고 작은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너는 못 만나는 거니? 안 만나는 거니? 설마 그 유재혁 그 새끼 못잊져서......"
수영의 눈과 입은 동시에 동그랗게 커지며 말끝을 흐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쳤어! 유재혁은 진짜 내 인생에서 파버리고 싶은 놈이야. " 눈의 흰자가 희번덕 더 많이 보이는 눈으로 수영을 째려보며 말했다.
"혹시 걔 죽고 파묘하고 싶으면 말해 같이 삽질해 줄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수영은 되지도 않는 농담에 설희는 수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에 지퍼 채우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유재혁......
유재혁은 설희의 전 남자친구로 6년을 사귀었었다. 유재혁과 같은 직장이었던 설희의 대학 후배와 바람이 났었다. 설희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배신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꼈고 오히려 도망치듯 그 둘의 관계에서 빠져나왔다.
"미안, 미안. 그 우라질 놈 얘기는 괜히 꺼내서......." 수영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제는 설희에게 유재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가슴 아프지도, 배신감에 치가 떨리지도, 미움도, 원망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그런 상태이다. 굳이 말하자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흑역사 정도?
설희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유명한 장면 중에 사랑에 힘든 여자 주인공이 마음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고 울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다쳐서 생채기가 나고 또 그 위에 딱지가 얹고, 또 생채기가 나고 이 과정들은 계속 반복하면서 결국 굳은살이 박히는 것처럼 마음도 굳은살이 박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설희는 결국 자신의 마음에 굳은살이 박인 건지 아닌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난 후 확실히 유재혁의 대한 모든 감정들이 사라졌다.
(띵동) <설희의 핸드폰>
- 초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쌓여가는 술병과 함께 완성형 취객이 되어버린 설희와 수영.
술에 취해 살짝 눈이 풀린 설희가 할 비밀얘기라도 있는 것처럼 수영에게 귀를 가까이 대보라고 손짓했다.
"근데 나 꿈에 자꾸 남자가 나와. 같은 남자가 매일...... 그리고......."
"아! 야! 너 이렇게 크게 얘기할 거면 왜 귀 대보라고 하고 지랄이야. 아휴, 고막 나가는 줄 알았네! 뭐 야한거 보고 잔 거 아니야? 베드신 보고 잤냐? 야 네가 너무 굶어서 그래!"
취기가 한껏 오른 수영은 왠지 응큼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얼굴 앞으로 휘저으며 웃었다.
"야! 나 진지하거드......." 설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설희의 머리가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설희의 집)
'또 당신이네요. 맨날 얼굴은 보여주지 않아도......'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촉감의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과 옆에 누워 있을 때도 느껴지는 큰 키와 그리고 직각으로 떡 벌어진 넓은 어깨, 한껏 단단하게 발달된 가슴, 골반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이상적인 라인을 따라가다 긴 다리의 발끝에서 시선이 멈췄다.
넓은 그의 가슴팍에 설희는 얼굴을 문대며 파고들었다.
그리고 복부를 따라 선명한 치골까지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며 시선이 내려갔다.
언뜻 봐도 침대에 길이가 꽉 찰만큼 키가 컸다.
설희는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다.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각해 놓은 것 같은 근육과 그 위로 도드라져 뻗대고 있는 핏줄, 나무랄 데 없는 예술작품 같은 그의 몸매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설희의 몸을 둘러싸고 설희의 위로 올라왔다.
'어, 얼굴이 보일 것 같은데...... 당신의 얼굴이...... 보여!'
순간 설희의 얼굴 위로 그의 얼굴이 포개졌다.
그의 입술이 설희의 입술을 살짝 깨물 때마다 설희의 입술은 촉촉해졌다. '분명 꿈인데 입술에 닿는 이 느낌은 뭐지?...'
생각도 잠시, 그가 설희에게 숨을 건넬 때마다 나는 복숭아 향기가 설희를 더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는 설희를 점점 파고들었다.
둘은 서로에게 깊숙이 물들어갔다.
햇살처럼 따뜻하고 새 이불처럼 포근하게 서로의 몸을 감싸며 그 공간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가 설희를 품에 안으며 차례로 머리, 귓바퀴에서 귓불, 귀 뒤로 이어지는 목 라인에서 쇄골로 떨어지는 설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마다 현실과 착각할 정도로 모든 감각이 설희에게 느껴졌다.
평소에 이렇게 짜릿한 오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설희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속을 점점 더 파고들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내보냈다. 촉촉하고 말캉하게 닿는 그의 입술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몸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매끄럽고 하얀 살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설희의 살결이 서로 닿을 때 포근함과 따뜻함, 설희가 그토록 바라던 안정감이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설희의 봄이 절정일 때의 만발한 꽃향기에 취한 듯 정신이 아득해지며 계속 이대로 있고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
'내가 수영이 말대로 진짜 너무 굶어서 그런 건가? 아무렴 어떠냐. 그냥 꿈 안 깼으면 좋겠다. 제발.' 설희는 간절하게 바랐다.
다음날 아침
설희는 잠결에 자신의 몸에 다른 사람의 살결이 닿는 것을 어렴풋 느꼈다.
설희의 배게 옆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직 잠이 덜 깨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밀려오는 잠에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다시 잠에 빠져드는 그때......
확실한 온기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