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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Oct 16. 2023

·사진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

부제: 개념미술로 도피한 사진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늘 ‘내가 남의 것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물론 사진은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고, 사진에 찍히는  세상의 모습이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아무튼 사진 프레임에 포함된 것들 중에 정작 내 소유물이나 내가 창조한 게 거의 다는 건 사실이다.

내가 찍은 사진에 대해 누군가 시시비비를 따지려고 든다면 문제될 소지도 있을 것 같다.

모방이나 참조라고 볼 수도 있고, 표절이나 도용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불명예스럽게도) ‘누설했다’거나 ‘훔쳐보기’라는 식으로 탓하는 사람까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점점 ‘사진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대신 사진에서 정작 중요한 건 ‘사진가의 관점이나 의도’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사진가 고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들 같은 세상을 보고 있지만, 사진가들은 각자 다른 창을 통해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사진에 찍힌 게 무엇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으며, '예술적 창조성의 핵심은 관점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형식이 아니라) '생각이나 아이디어' 즉 '개념'이 된다.

물론 그 ‘주장’은 사진의 관람자 뿐 아니라, 사진가가 자기 자신을 향한 ‘설득’이기도 하다.

예술에서 중요한 건 ‘나 자신’이고, 어떻게든 사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명분을 찾아야만 할 테니까.


아파트 정원


외국의 어떤 사진가는 자기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는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약간 부끄러웠다.

그러나 사진활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사진가가 되었다.'


그는 책에 이유를 적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 말은 아마도 그가 사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사진 그 자체에서 아이디어쪽으로 옮겨갔다'는 말일 것이다.

한 마디로, '사진은 중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굳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아파트 정원에서 사진을 찍는다. 코로나 때문에 이런저런 촬영모임이 중단되고 혼자 시내 길거리로 나가서 사진을 찍는 일도 줄어들었다. 덕분에 찰칵찰칵 셔터소리가 그리웠고, 갈증을 해소하려고 집 부근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잦아졌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 정원은 별로 볼품이 없다.


정성스럽게 정원을 조성했다지만, ‘아직 덜 자연스럽다’고나 할까? 큰 나무에는 보기 싫은 버팀목이 네 개씩 빠짐없이 세워져 있고, 관목들은 새 흙에 적응하느라 한쪽 귀퉁이에서 잎이 시들고 있다. 뿌리가 아직 제대로 벋지 않은 잔디밭은 빗물과 사람 발길에 의해 여기저기 패였다. 계절이 두 번 바뀌면서 나아졌지만 아직 식물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지는 못한 것 같다.


정원은 꽤 짜임새 있게 조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인공폭포와 개울과 연못이 있고 식물가지런히 줄지어 심어서 만든 울타리가 있으며 장미와 허브정원이 있다. 식물들은 조경석과 큰 나무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어서 철 따라 꽃이 피고 이파리가 아름다운 다양한 식물들이 화단을 장식한다. 정원의 모든 것이 아파트 주민들의 편리한 생활과 미적 취향 등을 고려해서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조경사가 자연을 본 따서, 크고 작은 나무를 조화롭게 심어 숲을 조성하고, 작은 폭포와 시냇물이 흐르는 도랑과 연못을 만들고, 곳곳에 그 장소에 잘 어울릴만한 식물을 심었을 것이다. 그 때 자연생태적인 검토는 물론이고 미적인 부분까지 고려해서 만든 게 분명하다. 다만 아직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았기에, 자연의 손길보다는 인간의 손길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게 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파트 정원에서 사진을 찍을 때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든다. 남이 연출한 것들을 피사체로 삼아 내가 사진을 찍고 있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와 덤불의 위치, 조경석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여러 종류 식물들 그리고 그 이파리가 벋은 방향과 꽃이 핀 모습 등은 전부 조경업자나 정원사가 의도한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나는 정원을 볼 때 그 사람들의 손길과 의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마치 갤러리에 들어가서 남의 그림이나 설치미술작품을 촬영할 때처럼 찜찜한 느낌도 들었다.


'꽃을 이 자리에 피어있게 한 건, 분명 그 사람들일 것이다.'


정원에는 조경사의 미적 감각과 정원사의 정성스런 손길로 다듬어진 다양한 피사체로 가득하다. 어쩌면 나는 그 분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을 사진으로 찍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비약이 심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내 사진이 이 공간을 꾸민 조경사나 정원사의 솜씨에 빚지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만약 자기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진가라면, 이런 점은 작품에 큰 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남의 손을 너무 많이 빌린 나머지, '정작 작가는 누구인가?' 식의 의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에서 요즘 음악을 작곡하는 방식에 대해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떤 가수 겸 작곡가의 음악 표절 논란에 대한 얘기가 오가던 중에 출연자 중 한 명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요즘 작곡가들은 DAW(Digital Audio Workstation)라는 오디오 편집 툴로 음원을 조립하고 뒤섞어서 음악과 노래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작곡가들이 오선지에 음표를 하나하나 그려 넣는 식으로 작곡을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놀랐다. 그러나 다시 잘 생각해보니, ‘음악만은 과거 아날로그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을 거’라는 내 인식이 오히려 놀라운 것이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포토샵에서 수정하고 편집해서 작품으로 완성하는 디지털사진이 대세가 되어있는 사진 분야를 생각해보면, 음악도 같은 방식으로 변화해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관심이 없다 보니, 막연히 음악은 예전 그대로인 것처럼 착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사진을 편집하는 포토샵처럼, (RAW상태의) 음원을 투입해서, 수정하고 엮고 뒤섞어서 음악을 완성할 수 있게 해주는 ‘디지털 음원 편집 툴’이 있고, 디지털 음악은 그런 툴을 통해 작곡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영상도 이미 오래 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진짜 놀랐던 부분은, 작곡가들이 음원을 조립하고 믹스(mix)해서 음악을 작곡할 때, 사용하는 그 음원이 대부분 ‘남이 만든 것’이라는 얘기였다. 출연자의 말에 의하면 인터넷에 이미 만들어진 샘플 음악이 무진장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무료로 또는 소액을 지불하고,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며, 저작권도 없어서, 그것들을 갖다가 적당히 엮고 수정해서, 자기가 작곡한 음악으로 발표해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 방식은 ‘표절’이 아닌 ‘레퍼런스(reference)’로 본다고 출연자 중 누군가 말했다. 글을 쓸 때 남의 글을 ‘참조’하듯이, 음악을 만들 때 남의 음악을 끼워 넣는 것에도 그런 용어를 쓴다는 게 나는 생소했다.


출연자는 원음과 표절논란이 있는 음악의 해당 부분을 잘라, 번갈아 틀어서 두 음이 얼마나 비슷한지 확인시켜 주었다. 그게 표절인지 아닌지 판단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곳도 있고 변형시킨 부분도 있었지만, 기준 자체가 모호해서 판단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인터넷에 올라온 무료음원을 참조한 부분은 표절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른 작곡가의 음악 일부분을 무단으로 갖다가 자기 음악 안에서 사용한 경우였다. 하지만 나는 (남의 음악을 자기 작품에 갖다 쓴다는 점에서) 두 경우 다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음원이든 남이 발표한 음악이든 혹은 허락을 받거나 대가를 지불하고 사용했든 무단으로 사용했든, 심지어 참조표시를 했든 아니든,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음악이 원재료를 사다가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공산품과는 다를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건 소위 ‘창작활동’이며, 사람들이 창작활동을 대단하게 여기는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 만드는 ‘창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있는 것을 갖다 썼다면, 창작이나 창조의 의미는 상당부분 희석될 수밖에 없다. 다른 출연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노래의 특정한 대목이 좋아서 늘 흥얼거렸는데, 그게 바로 다른 음원에서 가져온 부분이었다는 걸 알고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물론 그 공짜 음원들은 단지 ‘짜임새가 있는 소리’일 뿐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처음 만든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어 완성된 음악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도 얼핏, 음원들을 선별해서, 전체 흐름과 분위기에 맞게 수정을 가하고, 배치하고 연결해서 한 편의 완성된 노래나 음악을 제작하는 창작의 과정이 여전히 중요할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만약 ‘참조했다’는 표시를 하면, 그런 부분을 (음악의) 소비자나 비평가들이 판단해서 평가할 때 감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을 공산품처럼 본다면, 남이 만든 음악도 돈을 주고 사거나 참조표시만 하면, 별 문제없을 것 같다. 그건 재료를 정당하게 구입하고, 기술이나 부품 역시 정상적으로 취득해서, 가공/조립해서 일정한 기능을 갖춘 완제품을 만든 것으로, 정상적인 제조활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작곡가가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자기 음악을 '작품'이라고 믿는 경우에는 좀 달리 봐야 할 것 같다. 아마도 (표절이든 참조든) 그의 자부심은 상당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고, 창작행위를 통한 만족감도 줄었을 것이다. 이렇게 물어보면 될 것 같다.


작곡가는 자기 작품에 대해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상업적 목적은 달성했을지언정, 그런 방식을 써서 만든 작품을 통해서도 '자아실현'이 될 수 있을까? 예술을 하는 궁극적 목적이 바로 그게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그 작품에 애착이 가기는 할까? 자기 음악을 좋아하는 관객이 남의 음원에서 ‘참조’했던, 어떤 한 소절에 꽂힌 나머지 그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화단에서 사진을 찍을 때 느꼈듯이, 기분이 찜찜하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곡가가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래도 좋다는 데!‘


남이 왈가왈부할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이 뭐라고 하든, (만약 거리낌이 있다면) 그는 이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다. 예술 활동을 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만들어서 파는 것이라기보다) ‘자기만족’이고 ‘자아실현’이다. 그가 만약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꼈다면, 자의식에 손상을 입었거나 그 작업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남의 조각이나 설치작품 등을 사진 찍고는, 사진에 밴 예술의 분자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뜨악해 하는 사진가의 모습이다.



‘나는 남의 사진을 절대로 사진으로 찍지 않는다’고 장담한 어떤 사진가의 말이 기억난다. 어떤 책에서 그 말을 읽고, 처음에 나는 ‘웬 생뚱맞은 소린가’ 했다. 설마하니 남의 사진을 사진 찍어서 자기 작품으로 발표하는 사진가도 있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흔한 일이다. 세상에는 온통 사진이 넘쳐난다. 건물 전광판이나 지하철 광고판과 길거리의 입간판은 물론 전봇대나 건물 벽의 광고전단에도 사진이 있다. 나는 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 굳이 그 사진들을 배제하려고 들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의 사진들을 내 사진의 프레임 안에 포함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자주 느낀다. 남의 사진이 내 사진 안에 포함되면, 그 사진의 ‘좋은 점’이 그대로 내 사진에서도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멋지고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사진이 내 사진 안에 들어오면, 내사진도 멋지고 우아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사진의 기본은 복제기능이고, ‘좋은 것을 찍으면 좋은 사진이 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비록 ‘좋은 것’에 대한 정의를 재고할 필요는 있을지언정, 눈에 빤히 보이는 그 명백한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따지고 보면, 비단 ‘남의 사진’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인식을 확장하면, 남의 그림이나 건축물이나 연출된 쇼-윈도우나 심지어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의상이나 장신구들까지, 사진가가 자기 사진의 피사체로 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도시 길거리에는 누군가의 미적 감각을 통과해서 걸러진 멋진 작품들로 가득하다. 건축가의 건축물과 각종 조형물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자기 가게로 사람들 시선을 끌려고 상인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만들었을 인테리어에는 목수나 인테리어 업자의 미적 감각이 깃들어 있다. 쇼윈도우는 물론이고 거기 진열된 물건들에도 사람들에게 팔기 위해 디자인한 제조사 디자이너의 안목이 배어있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이나 모자나 장식물 역시 누군가의 작품일 수 있고, 옷과 모자와 장신구를 조화롭게 치장한 사람들의 세련된 감각 역시 내 사진에 기여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확대해서 말하자면 끝이 없고, 결국은 사진 안에 정작 ‘내 것’이라고 할만 한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나는 있는 것을 가져다가 단지 내 프레임 안에 집어넣기만 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선별하고 재단하고 요모조모 살펴서 보는 관점을 약간 변화시켜 사진을 찍은 것뿐이었다. 나는 ‘좋은 것을 사진으로 찍으면 좋은 사진이 된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마냥 ‘좋은 것’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남들의 성과가 잔뜩 담긴 내 사진을 보며 (바보처럼 또는 파렴치한처럼) 뿌듯해 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진짜로, 만든 사람들의 의도를 베끼고 그 성과를 훔쳐서 내 것으로 삼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사진가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사진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건 그 사진을 찍은 사진가의 ‘생각과 아이디어’라는 얘기다. 그건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사상이고, 사진가들은 개념미술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진이 중요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온통 남의 것 투성이인, 사진 그 자체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해버리면, 사진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 개념미술의 선구자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미술가의 역할은 물질을 교묘하게 치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의 고찰을 위한 선택에 있다”고 정의했는데 이것이 개념미술의 근본적인 미학이다.(네이버지식백과 패션전문자료사전) ]


'...선택에 있다.'


마치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선택한 것뿐이었다'며 찜찜해하는 사진가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말처럼 들린다.


개념미술은 예술작품에서는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은 별 것 아니라는 입장이다. 중요한 건 작품(형식)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가진 생각이나 관점(내용)이라는 얘기다. 한데 1917년 뒤샹이 그런 주장을 하기도 전에, 사진가들은 이미 ‘같은 태도’로 작품을 제작해왔다고 할 수 있다. ‘결과물(사진)은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정신활동, 즉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태도 말이다. 물론 당시 사진가들에게 그런 인식은 없었지만, 이미 존재하는 외부세계를 사진 찍어서 작품을 만드는 사진의 방식이 이미 '그런 전제 아래 활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과물(형식)이 중요하다면,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만들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선택을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생각이 중요해야만 한다. 개념미술이 나오기도 전에 사진가들은 이미 '만드는 대신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선택만 하는' 그 방식을 행동으로 실천해 온 것이다. <뒤썅>은 그런 사진가들의 활동을 보면서, 그들의 입장을 대신 설명한 셈이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런 점에서 사진가들을 ‘그 사상의 창시자’로 봐도 될 것 같다.




사진가가 ‘자기 작품’이라며 내미는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온통 남의 것으로 가득하고 ‘창작했다’고 볼만한 요소는 거의 없다. 사진 그 자체(형식미)가 중요하다면, 사진가는 꼼짝없이 남의 것을 도용해서 자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파렴치한이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조각 작품을, 남의 그림을, 남이 만든 건물과 정원을, 쇼-윈도우를, 거리에 다니는 다른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뿐 아니라, 자연의 놀라운 작품인 풍경과 동물과 식물도 사진으로 찍어서 마치 자기가 창조한 '작품'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시한다. 하지만 그 사진 안에는 온통 남이 만든 것들로만 가득하다. 만약 음악을 두고 한 소절 한 소절 비교해서 표절여부를 따지듯이 하면, 아마 거의 모든 사진이 99% 표절로 판정 날 것이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오직 하나 ‘그의 것’이 사진에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그 사진을 찍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관념적인 것은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남들이 시비를 걸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중요한 건, 그 생각과 아이디어이고 나머지는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면 된다. 창조한 게 거의 없는 사진을 통해서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되는 방법은 아마 그뿐이었을 것이다. 사진가가 창조한 건 (사진이 아닌) ‘그 사진을 찍기 위한 생각이나 관점이었다’고 주장하면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개념미술이 창안되기도 전에 사진은 이미 그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물론 사진이 태생적으로 남의 것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는 매체인 때문이다. 사진가들은 사진 그 자체에다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기 부담스러운 입장이 되었고, ‘중요한 건 사진이 아니라, 그런 것을 사진으로 찍었던 그 사진가의 생각과 관점이라’는 식의 해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진은 시대를 앞서가는 매체인 게 분명하다. 미리 다른 예술의 앞길을 터주는 역할까지 했으니. 물론 자기 앞길을 트느라 그랬던 것이지만.




미러리스 카메라 한 대만 달랑 메고 가까운 곳에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면 나는 ‘자유’를 느낀다. 무겁고 많은 장비로부터의 자유. 시간과 공간적 압박으로부터의 자유. 뭔가 특별한 걸 사진 찍어와야만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의 자유. 장비가 단출하면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가 줄어들고 머릿속이 단순해진다. 가진 장비로 할 수 있는 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탐색의 범위가 줄어들고 (집적거릴) 대상이 줄어든다.


이른 아침 멋진 빛이 비치는 ‘매직아워’에 사진을 찍으려고 새벽에 차를 타고 집을 나설 필요가 없고, 저녁식사시간을 늦추면서 해가 기울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물론 좀처럼 도와주지 않는 날씨 때문에 실망할 필요도 없다. 멀리가면 시간에 맞춰서 이동해야 하고, 그에 따른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만족감을 맛보기 힘들어진다.


'거기까지 가서 빈손으로 돌아 왔다니...'


그러나 집 앞에 나가면 그럴 일이 없다. 작은 성과에도 만족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꾸 바깥상황을 살피는 대신, 나 자신에 집중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거기 뭐가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는 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늘 보던 풍경이라 새로울 게 없다보니 새로운 관점이나마 가져 보려고 애를 쓰게 된다.


나는 (비록 그가 만든 것을 사진 찍지만) 조경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정원의 풍경을 바라본다. 따라서 비록 사진 안에 그의 작품(?)이 찍혀있을지언정, 내 사진은 조경사와는 전혀 상관없다. 사진에서는 생각과 아이디어가 중요하지, 사진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사진을 찍게 하기 위해서 정원을 조성한 건 아닐 것이다. 화단을 꾸밀 때, 내가 이런 사진을 찍을 것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정원을 꾸민 정원사와 같은 관점으로 정원을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그의 의도와 기술과 노력의 결실을 무단으로 차용했다고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의도는 나의 의도와 달랐고, 따라서  사진은 그가 만든 정원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사진에서 정작 중요한 건 사진이 아니라 아이디어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의도는 '정원에 대한 나의 관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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