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사진과 디지털 사진 - 2
식사가 알약으로 대체되면, 얼마나 편할까?
요리할 필요가 없어지고, 성가신 설거지거리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식사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그러니 가끔은 편리함의 이면을 들여다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혹시나 그게 재미를 쏙쏙 빼먹어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무의미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지는 않는지.
두 팔을 앞으로 뻗거나 양손을 치켜들고 사진을 찍는,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의 촬영자세가 초보자나 비전문가처럼 보일까?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전문가들이 사용하는(흔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SLR카메라는 눈에 갖다 붙여서 찍는 방식이고, 일반인들이 주로 쓰는 똑딱이나 스마트-폰은 두 팔을 뻗은 자세로 사진을 찍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제 미러리스는 스펙이나 기능면에서 SLR카메라에 못지않다. 그래서 주변에 미러리스를 선택하는 사진가들이 많아졌고, 나도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게 주된 장비가 되었다. 특히 카메라가 디지털화 되면서, SLR보다는 미러리스 방식이 구조적/기능적으로 더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디지털의 관점에서 보면, SLR카메라는 다소 엉거주춤한 구조다.
SLR카메라와 미러리스카메라의 구조는 (미러리스라는 말 그대로) ‘거울이 있고, 없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SLR카메라는 렌즈 뒤에 거울을 설치해서 렌즈를 통과한 상(像)이 거울에 반사되어 카메라 상단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카메라 박스 안에 거울을 설치하고 (촬영 시에는 젖혀져야 하기 때문에) 거울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공간도 확보해야 해서, 덩치가 커지는 원인이 된다. 반면에 미러리스는 거울을 빼서, 부피가 작고 무게도 가벼워졌다. 거울을 제거할 수 있게 된 건 물론 디지털 센서에 포착된 상을 LCD모니터나 전자식 뷰파인더에 전달해서 볼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작고 가볍다는 장점을 들면서 무거운 SLR카메라를 처분하고 미러리스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가 SLR에서 미러리스로 바뀐 데는 그 밖에도 많은 의미가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카메라를 얼굴에 갖다 붙이지 않고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카메라가 디지털 화 되면서 일어난 제일 큰 혁신은 노출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점일 것이다. LCD모니터를 통해서 곧 찍힐 사진을 미리 보며 사진을 찍는 방식은 마치 답을 보고 문제를 푸는 것과 같아서 ‘사진기술’을 거의 쓸데없는 기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전문사진가들이 촬영기술 때문에 우쭐댈 일이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카메라를 얼굴에서 뗄 자유'도 그에 못지않게 '획기적'인 사건이다. 잘 생각해보면, 그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 ‘카메라를 얼굴에 갖다 붙이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미러리스를 선택했다. SLR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본 경험이 없는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카메라를 눈에서 뗀 채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사건이다. SLR카메라로는 눈높이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뷰파인더로 촬영할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얼굴에 갖다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다리에 올라서거나 아니면 노-파인더로 찍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작은 꽃 사진을 찍으려면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앵글파인더를 써야만 한다.
내 생각에 미러리스 카메라의 최대 장점은 ‘앵글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건 물론 카메라 뒷면에 붙은 LCD모니터를 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조 덕분이다. 사다리에 올라서야 가능한 하이앵글 사진도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드는 간단한 자세만 취하면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앵글파인더와 같은 보조장치 없이도 허리 아래까지 카메라를 내려서 찍는 로-앵글 촬영이 가능하다. 그런 앵글은, SLR카메라의 경우라면, 보조장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제 사다리나 앵글파인더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여기에 ‘혁명’이라는 말을 붙여도 괜찮지 않을까?
사진의 성패는 거의 ‘틀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핵심은 앵글과 프레임에 있다. 사진가는 피사체에 프레임을 맞추면서 대상을 선택하고, 앵글을 이용해서 바라보는 각도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사진에 나타나고, 그 부분이 바로 사진과 사진 행위의 기본이 된다. 앵글과 프레임을 어떻게 구사하는 지에 따라, 구도(혹은 구성)가 달라지고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어떤 것을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사진에 담을까? 그런 게 바로 사진가가 사진에 자기 의도를 담는 수단이 되고, ‘틀을 잘 다루는 사람이 곧 유능한 사진가’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사진을 잘 찍기 위해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일중에 앵글과 프레임 조작을 빼면 또 뭐가 있을까? 그래서 그 부분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 간편해지고 활용의 폭이 넓어졌다는 건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특히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면 다양한 앵글을 구사하기에 편해서 미러리스 카메라를 자주 쓴다. 팔을 뻗어서 카메라를 사방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쉽게 앵글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총을 겨누는 듯한 SLR카메라의 촬영자세가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두 팔을 들어 앞으로 내미는 미러리스식 촬영자세가 위화감이 적은 것도 같았다.
아무튼 LCD모니터를 보면서 사진을 찍는 디지털 미러리스의 그 촬영자세는 근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 앵글을 쉽게 구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하다. 특히 (인물사진처럼) 근거리 촬영에서, 피사체를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는 데 필요한 공간이 사방으로 팔 길이만큼 더 생긴다는 건 아주 큰 이점이다. 바보멍청이가 아니라면, 무조건 미러리스를 써야만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미러리스 카메라에는 몇 가지 단점도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초기의 단점들이 대부분 개선되었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해결하기에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전원을 키면 센서가 항상 켜져 있어서 배터리 소모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 카메라가 획기적으로 작고 가벼워졌어도 (물리적인 이유로) 렌즈 크기는 줄일 수 없어서 소형화와 경량화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밝은 햇빛아래서는 LCD모니터가 잘 안 보인다는 점 등이 구조적이고 난해한 문제다. 특히 덩치가 작아진 카메라에 비해 커다란 렌즈가 달린 모습이 (마치 가분수처럼) 몹시 어색해 보이지만, 더 이상의 소형화/경량화는 힘들 것 같다. 렌즈 직경을 작게 만들고, 대물렌즈와 대안렌즈 사이의 거리를 줄이면서도 광학적 기능은 그대로 유지한다든지, 이미지센서의 면적은 줄이지 않고 렌즈와 센서간의 거리를 좁힌다는 건 물리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미러리스 카메라가 가진 가장 결정적인 단점은 역시 그 '보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카메라를 눈에서 뗄 수 있게 되어, 앵글을 더 폭넓고 편리하게 구사할 수 있는 대신 치르게 된 대가라고나 할까? 나는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의 최대 단점은 ‘사진 찍는 재미를 잃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너무 쉽고 편하다 보면 재미를 잃고 의미도 잘 못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필름이 반도체센서로 교체되고, 사진이미지의 실체가 디지털 신호로 바뀌면서, 전에 물질이었던 사진은 이제 물질 아닌 것이 되었다. 그렇게 그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도 나지 않는 유령같은 이미지가 되는 바람에, 그것을 다루는 사진가들에게 극심한 공허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제 미러리스가 그 공허감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은 것 같다.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진동무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 건지, 좋은 이미지를 건지려고 애쓰고 있는 건지 헛갈리더군요. “
미러리스 카메라의 LCD모니터를 보며 사진을 찍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이지만, 내가 느낀 대로 다시 말해 보면, 사진을 찍는다는 게 마치 캠코더로 동영상을 찍다가 정지화면을 캡처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텔레비전 화면을 보다가 특정한 장면을 선택해서 사진을 찍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 그건 물론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이 실물(實物)이 아니라, LCD모니터에 떠있는 영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영상을 보면서 (마치 그것을) 사진 찍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니까 나는 미러리스로 사진을 찍을 때면,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일련의 영상들을 LCD모니터로 보다가 그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을 캡처하거나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에서 스크린 샷을 저장하는 식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내가 찍는 사진이 영상의 영상 즉, 2차 영상인 것 같고, 나는 복제된 것을 다시 복제하는 꼴이 된 것만 같았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LCD모니터 속 영상도 틀림없이 내가 선택한 장면이고 내가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LCD모니터나 EVF(전자식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찍을 때면 왠지 김이 새는 것만 같다.
양손을 눈앞에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로 네모를 만들어서, 그 창을 통해 눈앞의 장면을 바라보며 놀기도 하듯이, '실물에 틀을 대서 바라보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즐거움을 주는 측면이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재단한, 나만의 고유한 창을 통해서 세계를 내다볼 때 느끼는 즐거움일 것이다. LCD모니터나 EVF를 보면서 사진을 찍는 방식에는 그런 느낌을 희석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사진가가 아닌 분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는 재미는 상당부분 '눈앞에 있는 실제 현실이 사진으로 바뀌는 과정을 관찰하는 데'서 생겨난다. 어쩌면 의미도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인 지도 모른다. 나는 열심히 뭔가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주워 담고 있는 게 아니다.
SLR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보이는 장면은 (비록 렌즈를 통과해서 보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실제현실이고 실물이다. 그런데 셔터를 눌러서 카메라에 찍히는 건 사진인 것이다. 사진가들은 대게 이 과정을 통해서 어떤 재미를 느끼고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틀에 가둬놓고 자세하고 정확하게 본다’는 건 사진촬영의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건 전문사진가나 사진동호인들이 광학식 뷰파인더의 성능에 얼마나 까다롭게 굴며, 면적에 집착하는 지만 봐도 알 수 있다. 디지털 SLR카메라는 실물을 눈으로 보면서 촬영할 뿐 아니라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기다림에 따른 설렘도 약간 누릴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뷰파인더 안에 보이는 장면을 관찰하고 검토하면서, 곧 찍혀 나올 사진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재미와 함께 결과물 사진이 어떻게 찍힐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있는 것이다. DP점에 필름을 맡겼다면 내가 제대로 했는지 어서 확인하고 싶어서 조바심을 낼 지도 모른다. 디지털 SLR카메라라면, 찍은 뒤에, 어떤 사진이 찍혔는지 궁금해서 얼른 LCD모니터로 확인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런 촬영경험을 통해서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하고, 그런 많은 사례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고, 거기 익숙해져 가는 게 '사진을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쳐다보게 되는, 미러리스 카메라의 LCD모니터나 EVF에 떠있는 영상은 이미 사진이다. 그건 (물질세계가 아니라) 디지털로 전환된 장면인 것이다. 그 때 벌써 셔터 막이 열려있어서 외부 상황은 영상이 되어 센서에 기록되고 있다. 카메라가 마치 생중계를 하듯이 그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리 보기’ 식으로 떠있는 그 영상을 보며 사진을 찍을 때, 사진가는 예측하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다. 결과가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실패인지 성공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고 기대도 실망도 있을 수 없다.
마치 답안지를 보고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의 편리한 촬영방식은 (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냈는지) 기대하는 데서 오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상황을 보고 판단해서 미리 예측하는 능력이 향상되는 데서 생겨날 성취감도 없애버린다. 특히 '실물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가 아니면 영상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가?'식의 의문을 갖게 만드는 바람에, 사진가가 (사진의) 의미에 대한 회의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시 카메라가 만들어둔 영상을 내가 캡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얘기도 가능할 것 같다.
회의적인 사진가라면, 같은 현상을 두고, 약간 색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가 ‘사진촬영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을 나에게 깨우쳐 준 것’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나는 미러리스로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찍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진찍기란 본질적으로 ‘눈으로 세상을 스캔해서 구미에 맞는 이미지(영상)를 골라서 센서에 담는 과정’일 터였다. 그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뭘 ‘창작(창조)해내는 행위’는 아니다.
내가 피사체를 가리키면, 카메라는 열심히 영상(사진이다)을 제작해서, LCD모니터를 통해서 (자기가 만든 작품을) 나에게 보여준다. 물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는 다른 걸 가리킬 수도 있고,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영상(이미지) 제작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영상 제작은 카메라가 맡고, 내 역할은 오직 대상을 가리키는 것 즉, '프레임과 앵글 선택'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사진제작의 핵심이 ‘무엇을 어떻게 가리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셈이다.
사진은 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빛이 동시에 확산되어 (디지털센서에) 자국을 남기는 방식으로 제작되고, 사진가는 그 '작화(作畵)의 순간'에 개입할 수 없다. 다만 미리 사진찍을 대상을 결정하고, 촬영각도와 방향과 거리 등을 맞추고 주어진 상황에 맞게 적당한 장치를 활용하는 정도로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한데 그 마저도 내 의도대로 할 수 없고, (날씨와 같은) 외부 상황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뿐 아니라 장치(카메라의 기능)가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만 관여할 수 있다. 물론 전에도 내가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디지털 미러리스식 촬영방식이) 굳이 그 사실을 일일이 까발려서, 나에게 매 순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이런 식의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된다. ‘어쩌면 그 동안 SLR카메라의 광학식 뷰파인더가 사진가들에게 ‘사진이 자기 작품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것인 지도 모른다’는 식의 생각이다. 특히 멋진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그게 자기가 그린 그림이라는 데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들을 볼 때면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런 착각은 자기는 '실물'을 보고 있지만, 제작되는 것은 ‘사진’ 즉 ‘영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부에서 부지런히 영상을 제작하고 있는, 카메라의 존재를 깜박 잊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히려 SLR카메라의 뷰파인더가 (카메라를 조종해서 작동시킨) 사진가가 자기 역할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실물(혹은 현실)을 직접 보며 셔터를 누르다 보니, 그는 자기 자신이 '직접 사진을 만든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화가의 붓에 비교하는 등, 장치의 역할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실수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거짓낭만과 기만적 행복'에 취하도록 유도했던 셈이다. 한편, 미러리스 카메라는 LCD모니터를 통해 사진가들에게 자기(카메라)가 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일러 줌으로서 오해의 여지가 없게 했다. 물론 그 덕분에 사진가는 김이 샌다.
카메라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품은 내가 만들 테니 너는 캡처만 해!"
진실은 원래 잔인한 법이다. 과학적 사고를 기초 삼아, 조목조목 따지다 보면, 결국 우리 삶조차도 ‘본래 무의미하다’는 식의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의미는 역시 어려움 속에서만 싹틀 수 있는 모양이다. 불편과 난관을 이겨내고 좋은 결과를 얻어낼 때 비로소 의미도 느끼게 된다. 셔터를 누르면, 철컥철컥 미러가 올라가고 셔터 막 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사진이 찍히고 나면, 위~잉하며 필름 감기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마치 내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필름이 현상/인화되어 눈앞에 사진이 보일 때까지 불안과 기대감을 품은 채, 조바심치거나 마음 설레며 기다리게 된다. 필름을 꺼내 암실로 가져가서 현상하고, 인화된 사진을 집게로 집어서 널어놓고 나설 때면, 그 귀찮고 성가신 과정을 통해서, 마치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을 찍어서 책상 앞에 앉아 파일을 다운받아 모니터 위에 띄워 놓으면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내가 한 일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쉽게 할 수 있고 흔해 빠졌다’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것과 같다.
디지털 사진은 ‘사진’이라는 물질적 실체를 없애고 전기신호로 만들어서, 그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낳았다. 게다가 과정을 없애거나 편하게 바꿔서 원래 힘들고 어렵던 일을 쉬운 일로 만들어 버렸다. 결과물이 눈앞에 바로 보여서 상상력이 작동할 여지가 없게 하고, 기다림을 통한 기대감도 사라지게 되었다. 답을 보고 문제를 풀다 보니 문제 푸는 재미도 없어졌다. 컷 수가 너무 많다 보니 흔해 빠져서, 가치를 느끼기도 힘들어졌다. 여기에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가 사진은 내가 찍는 게 아니라 ‘자기가 찍은 사진을 나는 그냥 골라낼 뿐’이라는 식으로, 나를 자꾸 설득하려 들면서 무의미를 가중시켰다. "작품은 내가 만들 테니 너는 캡처만 해"
나는 종종 과거를 회상하며, ‘모든 게 부족하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는 식의 탄식을 일삼아 왔다. 나이가 들수록 (앞이 안 보이다 보니) 자꾸 뒤만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금세 머리를 흔들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건 단지 착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발전을 거듭해서 모든 게 더 좋아진 요즘 세상에,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노력해서 '마음을 고쳐 먹어야 된다'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처음 내 느낌이 옳았을 수도 있겠다. 편리함과 풍족함으로 인해 잠식되는 게 정작 ‘재미와 의미’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불편을 자초할 생각은 없다. 관점을 바꾸면, 재미와 의미는 다른 데서 찾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