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일 차 / 오세브로이로~트라야카스텔라)
오늘(10.22) 코스는 오 세브로이로(Ocebreiro)를 출발하여 ▷ 트라야 카스텔라(Triacastela)까지 20.8km를 5시간 동안 3만 3천 보를 걸었다. 오 세브레이로 ~포요 고개를 오르는 언덕을 빼고는 힘들지 않았다.
길을 출발하여 9km 정도 걸으면 포요 고개가 나오기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진다. 고개 정상에 있는 바 Bar에서 잠시 쉬며 맥주 한 잔 마시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전날보다 짧은 거리이기 때문에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비 때문에 서둘러 숙소를 찾아왔다.
아침 8시 식사를 하고 장도에 오른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내리친다. 제주도 올레길에서 비바람을 맞았던 기분과 비슷하다. 어쩌면 여수 금오도 비렁길 같기도 했다. 순례길 주변에 펼쳐지는 목장의 목초지가 짙푸르게 보여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숲 속으로 파고드니 가을밤나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길목에 수많은 밤나무들이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밤톨들을 땅에 털어놓았다. 누군가 내게 돌팔매질을 하는 줄 알았다. 우리는 잘 생긴 알밤들을 골라 이빨로 까서 군것질을 대신했다. 씹히는 소리가 식욕을 돋웠다. 우리네 밤과는 달리 비늘이 잘 벗겨져서 생밤으로 먹기가 편했다.
목초지로 이동하던 젖소들이 순례길에 내갈긴 쇠똥덩어리들이 비를 맞아 스펀지처럼 부풀어 올라있다. 이미 빗물에 씻겨간 뒤라 똥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다.
몽고를 포함한 유라시아 지역에서는 땔감으로 쓰거나 담을 쌓을 때 쓰고자 해도 없어서 못 구하는 쇠똥 덩어리들이 이곳에서는 천덕꾸러기로 대접받고 있다. 이 쇠똥을 모아 몽고로 수출하면 어떨까?
재수 없는 밤송이와 알밤들은 쇠똥 위에 낙하하기도 했다. 그 알밤들이 놀랄 것 같다. 낙하산을 타고 착륙했더니 적대국의 사령부에 마당에 내려앉은 기분이었을 것 같다. 쇠똥들이 부풀어 있다가 풀려서 길바닥을 꺼무튀튀하게 도금해 놓았다. 한 순간도 마음 놓고 걸을 수가 없는 지뢰밭이었다.
구릉지에는 방풍림과 고사리 군집지가 자주 나타나 빗길에서도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어 모았다. 곳곳에 고사리들이 무성하게 커서 갈색으로 변해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채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사리들은 갈색의 단풍 가을 단풍이 아니라 말라죽어 가는 모습이라 처연하다.
내 나이가 조금만 젊었어도 순례길에서 고사리를 뜯어다 경동시장에서 팔아먹을 생각을 할 텐데. 많은 알밤들도 주워다가 대학로나 홍대 앞에서 알밤장사를 한다면 여생에 돈 걱정을 안 해도 살 수 있을 텐데. 내 나이가 어때서? 묻는다. 피식 웃는다. 하는 소리지 무얼! 집 가까이 있는 우면산에서는 밤 한 톨을 구하기가 보물찾기 수준으로 어려운데 순례길에서는 커다란 알밤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혹시 밤톨을 주어 가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잘생긴 알밤만 고르고 골라 작은 배낭에 가득 채운다. 벌써 배낭에는 빈자리가 없다. 누가 말했던가? 배낭의 무게가 곧 ‘욕심의 무게’라고? 배낭 속에 욕심을 잔뜩 채워 둘러메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비바람을 가르며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나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자기 집 앞에서 밀가루 전을 두 장을 흔들면서 뭐라고 외친다. 공짜로 먹고 가라는 말 같아 우중에도 전을 건네받아 뜯어먹었다. 먹어보니 밀가루 냄새가 가득해서 기대했던 맛이 아니라서 괜히 먹은 것 같다. 빗물에 젖은 전을 어그적 어그적 씹어 먹고 있는데 대뜸 기부를 하란다.
비 오는 날의 기부! 유행가 제목 같지만 뻔뻔한 기부청구서였다. 이제야 내 뇌리에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후회막급이다. 배낭 안에 들어 있는 잔돈을 꺼내 보니 낱돈이 1.6 유료밖에 안 되었다. 할머니는 부침개 한 장에 1€씩 2장이니까 2€를 더 기부하란다. 이런 젠장! 기부가 아니라 강제징수였다.
기부를 빙자해서 맛대가리 없는 전을 팔아먹는 할머니였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우리말로 따졌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헛수고였다. 비는 내리는데 통역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손바닥으로 나의 기부(?)를 기다리고 있다.
할 수 없이 휴대폰 통역사를 불러내 낱돈이 없으니 5€를 낼 터이니 거슬러 달라고 말했더니 거스름돈이 없단다. 그 돈을 전부 기부하면 순례길에서 신의 가호를 받을 것이란다. 유사 이래 최고의 강적을 만난 삼국지의 유비표정으로 고민한다. 값에 비해 맛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5€에다 먹다 남은 전을 할매에게 되돌려주고 길을 떠났다. 젠장이다.
스페인 순례길에서 생전처음으로 바가지를 쓴 것이다. 마음이 씁쓸하고 불편하다. 한편으로는 할매에게 5€라는 통 큰 기부(?)를 하지 않고 떠나왔다는 사실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강적 할매여 미안해요. 안녕!
호스텔에 도착해서 배낭을 열고 잦은 옷가지와 쇠똥 밟아 냄새로 오염된 신발을 빨아 두루마리 휴지를 채워 습기를 흡수하도록 조치하고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낯익은 우리 청년들이 먼저 도착해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군대 동기간인데 제대하고 사회에 복귀하기 전에 순례길을 걸으러 온 친구들이다. 두 청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삼겹살을 구워 소주 안주로 먹으려 했는데 삼겹살이 너무 짜서 먹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6개월 이상을 말린 하몽(jamon)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몽은 스페인 여행자들이 꼭 먹어 봐야 한다고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것이 바로 그 하몽인 줄 몰랐단다. 나는 중국 배낭여행에서 하몽을 많이 사 먹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 어른이었다. 청춘이니까 실수해도 된다? 노인은 나이가 많으니깐 알고 있다. 하몽이니까 짜다고 알려준다.
하몽을 냄비에 넣고 잠깐 끓여 염기를 빼낸 다음 다시 굽는 방식으로 먹으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 아이디어를 제공한 대가로 아들 같은 두 청년으로부터 소주 한잔씩 얻어 마시고 길에서 주어온 알밤을 깎아서 그들과 나눠 먹으며 나의 과거와 그들의 군대 얘기를 꽃피우며 하며 저녁 식사를 해치웠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순례자들에게 여러 가지 영적 보상을 인정하고 있다.
첫째, 순례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순례자들에게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과를 용서를 받을 수 있다.
둘째, 순례자가 순례조건을 충족하면 대사(大赦)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대사란 죄에 대한 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면제받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완주하면 완전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셋째, 순례는 신앙을 깊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순례 과정에서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 등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
넷째, 순례를 통해 다른 신자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할 수 있다. 함께 걷고, 기도하고, 나누는 경험을 통해 형제애를 느낄 수 있다고 본다.
다섯째, 성지로의 순례는 특별한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로마, 예루살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같은 중요한 성지에서의 순례는 특별한 의미와 보상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보상정책들은 순례자가 진정한 마음으로 신앙을 실천하고자 할 때 더욱 의미를 가지며, 순례를 통해 신앙생활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만든 종교정책의 일종이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렇게 많은가?
차동엽 신부는 통계청 조사를 보면 종교인의 범죄 비율보다 비종교인의 범죄 비율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그나마 종교인이 범죄 수치를 낮추는데 기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인이 좀 더 사회정화 기능을 하지 못하고 데 성숙하게 살지 못하고, 좀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고해하였다(질문 20에 대한 답변, 차동엽: 189-190).
이에 김안제 교수는 '종교인들이 이기주의적이고 형식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은 안 바뀐 경우도 많았다고 한 차 신부의 평가는 매우 진솔하고 적확한 해석이라고 긍정했다. 나아가 종교를 자기의 출세나 치부를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백 번 잘못하고 한번 회개하면 모두 사면받는다는 '편의주의'도 존재한다고 비판했다(김안제: 756).
이어령 교수는 우리나라에 교회가 많아도 사회 범죄가 많은 현실을 한국 교회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각도에서 대답했다. 완벽하게 만들어진 사회보다, 힘들고 가난하더라도 자유와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교회가 많은 것과 범죄가 많은 것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교회가 없었다면 사회 범죄가 훨씬 더 심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존재가 더 큰 불행을 막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결국 교회가 존재함으로써 자유와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보았다(이어령: 56-57).
한국에서 교회와 신자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사회 범죄와 시련이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신앙과 일상생활에서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교리나 가르침은 따르지만 실제로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현대 사회의 경쟁과 스트레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경제적 압박, 직장 문제, 가족 갈등 등이 범죄와 시련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셋째, 교육 시스템과 사회적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물질적 성공이나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윤리적 판단 기준이 혼돈을 초래한 결과로 판단된다.
넷째, 교회가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신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원인도 있을 수 있다.
다섯째, 개인의 심리적 문제나 사회적 고립감이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지만, 교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정책을 개발하지 않았거나 그들을 지원을 하지 않는 결과일 수도 있다.
요컨대, 신앙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요인들이 복합되어 범죄와 시련이 발생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교회가 많은데 범죄가 많은 이유는 신앙과 삶을 별개로 보는 이원론적인 사고 인하여 신앙과 삶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로운 존재로 여겨주신다는 이신칭(以信稱)의 교리로 인하여 믿음만 강조하고 행위를 중요시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데는 행위가 작용하지 않지만 구원받은 신자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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