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 그만두면 뭐 할 거냐’는 말에 담긴 프레임

by 유칼립투스

어떤 친구가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승무원 그만두면 뭐 할 거야?"

대화 전 후의 맥락이나 뉘앙스로 봤을 때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척하지만,

그 안엔 히든 미닝이 있다.

'너는 다른 경력도 없고, 나이도 있고,

한국에서 새롭게 취직하기도 힘든데

도대체 뭘 해서 먹고살겠냐'는 프레임.


외국 항공사 10년 차 승무원이라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이제는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던지는지에 따라

그 말이 품은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다.


말은 질문처럼 던지지만,

그 말 안엔 이미 답이 들어있다.

내가 뭘 새롭게 못할 거라는 확신.


그래서 나도 모르는 척,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결정하기 힘들어요."


그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그 질문이 나를 가두려 했던 프레임에 대한

내 방식의 저항이었다.

나는 잠재능력이 많은 사람이고,

실제로 선택지가 많다.

문제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뭘 선택하느냐일 뿐이다.


비슷한 프레임은 또 있었다.


얼마 전 스레드에서, 어떤 전직 승무원이 글을 올렸다.

홍콩은 집값이 너무 비싸서, 단순히 비행만으론 생활이 안 된다는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계약도 3년이면 끝이라 안정성이 낮고,

많이들 그만둔다고 했다.


그 밑에, 한 아저씨가 아주 장황한 댓글을 남겼다.

요약하면 이랬다.

“여자 승무원들은 월급이 문제가 아닐걸요?

홍콩 부자 손님이나 중동 손님 꼬셔서 취집 하려는 게 목적일 거예요.”


진짜 어이없었다.

여자 승무원 = 취집?


꿈을 갖고, 치열하게 노력해서 입사한 사람들을

그렇게 한 문장으로 납작하게 만든다.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댓글을 남겼다.

“승무원들이 무슨 결혼에 환장한 줄 아나.

다들 영어 공부랑 면접 준비 빡세게 해서 꿈을 위해 온 사람들인데, 저런 댓글 진짜 어이없다.

역시 사람들은 자기 수준의 프레임 안에서만

사고하나봐요.”


맞다. 결국 다 자기 기준에서 생각하는 거다.


그 아저씨는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해서

편하게만 사는 게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내가 노력해서 어렵게 성취한 승무원이란 직업을 그 목표를 위한 도구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본인이 못 가본 세계, 해보지 못한 경험,

만들어보지 못한 결과들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편하게 축소시키는 것.

그게 그 프레임의 정체다.


외항사 승무원이 되는 거 정말 쉽지 않다.

내가 준비하던 당시, 경쟁률이 700:1인 적도 있었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수십 번의 탈락을 거쳐야 겨우 합격한다.


면접에서 답변을 아무리 잘해도

이유도 모른 채 탈락하고,

멘탈이 무너지는 경험을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이벤트처럼 겪는다.

영어 공부를 치밀하게 해야 하고,

외모 관리부터 영어 인터뷰 스킬까지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매주 면접 스터디를 두 개나 병행했고,

남들이 주말에 놀 때,

늘 책을 싸들고 카페에 가서

영어 공부와 인터뷰 연습에 매달렸다.


수십 번의 면접 탈락에서 오는 절망감과

직접 싸워내며 멘탈을 강화했다.

3차까지 힘들게 합격하고,

아슬아슬하게 파이널 인터뷰에서 떨어져서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날도

울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내가 왜 떨어졌는지'를 분석해서

내 단점을 갈아엎었다.


내가 번 돈은 면접 의상, 메이크업,

서울로 가는 교통비와 숙박비에 다 들어갔다.

매일매일 면접 생각만 했고,

그 하루하루의 노력이 쌓여서

‘합격’이라는 문 앞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남들이 취미 생활을 즐기고, 연애하고,

결혼 상대를 찾을 때

나는 아무도 몰라주는 그런 보이지 않는 노력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나 얕은 프레임으로

내 경험과 나의 성취를 눌러버리는 시선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흔들리는 시절은 지났다.


예전 같으면 억울하고, 나를 증명하고 싶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겠지만

지금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본다.


아, 또 그 수준의 프레임이구나.


이해는 하되, 수용하진 않는다.


나는, 내가 가본 세계를 알고

내가 만든 결과들을 아니까.


누가 뭐래도,

나는 계속 확장되고 있고

그걸 끝내 본 적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멀고, 깊은 곳을 보고 있다.


그래서 이젠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의 질문에 나의 가능성을 끼워 넣지 않는다.

그 프레임 안에 나를 구겨 넣지 않는다.


나는,

내가 정한 프레임 안에서만 설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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