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 하나와 단 한마디

by 이 경화


그간 많은 문장들이 오갔다. 많은 문장들을 기억하니 때론 떨리고 때론 무너지고 때론 아릿했다. 어떤 말은 오랫동안 가슴 안에 남아 있었고 어떤 말은 그날 하루 만에 지워졌지만 무엇 하나도 쉽게 지나간 적은 없었다. 문장은 때로 마음보다 더 정직했고 때로는 말보다 더 잔인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상처가 되기도 했고 말해버린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거리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말들의 무게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저 무심한 말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서야 그것이 얼마나 오래 준비된 고백이었는지 깨닫는 순간도 있었다. 반대로 아무렇지 않게 건넨 말이 누군가에게는 한밤을 울게 만든 고백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말을 아끼게 되었고 조심스레 다듬어진 마음만을 내보이게 되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따뜻했고 때로는 말보다 눈길이 더 깊었다. 사랑은 그렇게 점점 조용해졌고 나는 그 조용한 사랑을 오래 품고 살아가게 되었다.


두려움과 용기는 어쩌면 발자국 하나 차이고 따뜻함과 차가움은 순간의 단 한마디인데 사람 사이의 모든 이별과 놓침은 그런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곤 한다. 나는 그걸 조금 늦게 배웠다. 끝이라는 말은 언제나 담담하게 들리지만 그 말이 나오기까지 마음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갈등과 떨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먼저 돌아섰고 누군가는 아직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있었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었다. 어떤 감정은 멀어진 후에야 또렷해진다. 마음을 닫겠다는 말이 정말로 모든 마음을 지운다는 뜻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까이 가지 않기로 결심하면서도 여전히 멀리서 들여다보는 마음처럼 조용히 남아 있는 애틋함이 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아서 침묵 속에 머물렀고 다가서지 못해 거리로 남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에 존재했던 마음이었다. 나는 그조차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사람들은 잊으라고 말한다. 지나간 건 흘려보내라고 다 지난 일인데 왜 아직도 거기에 머무느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 진짜 사랑은 기억을 억지로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을 품은 채 살아내는 일이라는 걸. 시간이 가르쳐준 건 망각이 아니라 수용이었다. 그 사람을 다 잊지 못한 채 하루를 살아도 괜찮다는 것. 아직도 그리움이 불쑥 올라와도 내가 약한 게 아니라는 것.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더 강하다는 걸 나는 그렇게 천천히 배워갔다. 어느 날은 혼자 마시는 차 한 잔 안에 그 사람과의 대화가 녹아 있고 어느 날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하나에 그 사람의 침묵이 스며 있고 그렇게 나는 여전히 그 사람과 닮은 순간들을 마주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순간들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내가 사랑했던 시간도 나였고 그 마음을 견뎌낸 시간도 나였기 때문이다. 사랑이 내게 남긴 건 상처만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깊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해준 증거였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설명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였고 굳이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진심이었음을 이제는 알기에. 다가갈 수 있는 만큼만 다가가고 머무를 수 있는 만큼만 머물고 떠나야 할 때는 붙잡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무심함이 아니라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한 다짐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마음을 억지로 구속하지 않기 위한 존중이다. 사랑은 때로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묻는 대신 나는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기억하고 싶다. 내가 내어준 마음이 어떤 대답을 받았는지보다 그 마음이 얼마나 순했고 애틋했는지를 스스로 잊지 않기로 한다. 그 기억은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조용한 힘이 된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과거를 무겁게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나는 그 마음을 간직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인연이 다가온다면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더 이상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진심이란 언제나 천천히 흘러야 깊이 스며든다는 걸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랑을 가두지 않을 것이고 나 자신도 그 사랑 안에 잃지 않을 것이다. 오래 묵은 그리움과 이별조차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내 안의 따뜻함을 다시 꺼내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진심을 나 스스로 기억해주며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며 언젠가 그 마음이 다시 봄처럼 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주 조용히 말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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