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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터 : 죽음의 땅

Predator: Badlands

by allen rabbit

<프레데터>는 마지막까지 보기를 망설였다. 하지만 평이 좋길래 나의 영화 편식을 꾸짖으며 결국 봤다. 헐리우드가 막 세상을 점령했을 때, 홍콩 영화가 전성기였을 때 킬링타임용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어딘가 <스타워즈>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비슷한 SF 영화. 어쩐지 <최가박당>스럽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은 코미디 영화 등등. 여기에는 아무 맛이 안 날 때까지 몇 편이고 우려먹는 시리즈도 포함된다. 내게 <프레데터>는 이 긴 목록 중 하나가 됐다.


이야기는 제법 잘 짜여 있다. 주인공 덱은 열등하다고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지만 형의 희생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덱은 외계 행성에서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칼리스크”를 사냥하려 한다. 자신이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냉정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좋은 소재다.

덱은 이 낯선 행성에서 반토막이 된 휴머노이드 티아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는 하반신을, 덱은 칼리스크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설정도 역시 흥미롭다.

티아는 쌍둥이 테사에게 자매애를 느낀다. 하지만 마침내 테사를 만났을 때, 테사는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티아를 거부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덱과 아버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티아는 자매를 거부한 테사를 배신하고, 덱은 자신이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다.


외계 행성의 낯선 환경에서 낯선 생물들과 조우하고, 이것을 나중에 전투에 써먹는 아이디어도 좋다. 이상한 생물과 지구의 코퍼레이션, 회사 말만 잘 듣는 휴머노이드, 조금 과격한 고양이 같은 생명체와의 관계, 그리고 거대 로봇과 생명체의 싸움 등. 곳곳에 <에어리언>의 흔적도 보이고, 쉴 틈 없이 벌어지는 액션도 볼거리가 많다. 이 영화를 좋게 평한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일 듯하다.하지만 내게는 킬링타임용 영화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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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나왔던 <프레데터>를 기억한다. 그때의 <프레데터>는 명확히 지프와 사냥 총으로 무장하고 사파리에서 재미로 동물을 사냥하는 인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냥이라는 점은 같지만, 영화는 인간의 자리에 프레데터를 넣고 동물의 위치에 인간을 놓은 굉장히 신선한 설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프레데터>가 사는 행성의 모습과, 그들이 얼마나 높은 문명을 이루고 살까 굉장히 궁금했다. 하지만 30년 뒤에 보게 된 그들의 행성은 뜻밖에 굉장히 형편없었다. 중세 해적이나 도적떼의 소굴 같아서 도리어 지구인들의 근거지가 훨씬 더 문명적이고 그럴싸했다. 그렇다면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처음 <프레데터> 맞닥뜨렸던 때에는 높은 문명을 누리던 프레데터들이 시간이 흘러 인간이 휴머노이드로 외계 행성을 탐험할 즈음에는 저렇게 망해 버린 것일까?


때문인지 나는 영화 초반 설정부터 당황했었다. 첫 번째는 프레데터가 있는 공간이 너무 황량해서였고, 두 번째는 아무리 요즘 영화 주인공들이 전혀 멋지지 않은 게 대세라 해도 “프레데터”의 얼굴을 한 주인공이라니. 정말 정이 가지 않았다. 세 번째는 열등한 사냥꾼이라고 죽이려 하는 설정이다. 꼰대 아버지가 싸움 못하니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것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걸 형이 막아주려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형이 아버지를 주저 없이 베고, 아버지도 형을 가차 없이 죽이면서 어리둥절해졌다.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이길래 이러는 것일까?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영화 중간에 테사는 형이 아버지로부터 덱을 지켜주려고 한 이유를 티아가 듣지 못했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는 마지막까지 이 이야기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덱이 아버지를 죽이고 나면 갑자기 우주선이 등장하는데, 티아가 무슨 우주선이냐고 하자 덱은 엄마가 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프레데터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것이 아들이고 엄마고 상관없이 죽고 죽인다는 것이다. 무릎을 탁- 치는 놀라운 해결책이다. 그러니까 테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덱은 아직 느끼지 못했던 형제애를 형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의아해졌다. 열등한 존재는 죽어야 한다는 전제 때문에 우리는 고난에 빠진 덱을 응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덱은 과제를 해냈고, 강함을 증명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려고 하고, 덱은 거침없이 아버지를 죽인다. 그렇다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전제가 틀렸다는 말이 된다. 대체 나는 영화를 어떻게 본 것일까?

누군가는 타고난 사냥꾼인 프레데터들의 속성이 이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영화를 봐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비고 어미고 가리지 않고 죽이려고 달려들고, 달려드는 상대는 아들이건 부모 건 다 죽이는 이 세계를 내가 왜 봐야 하는지 의문이다.


문득 옛날 유명했던 어느 드라마가 떠오른다. 이 드라마에서 암 환자가 치료받기를 거부하면서 한 대사가 유명세를 탔던 적이 있었다.

“암도 어쨌든 생명체에요. 나 살자고 죽이는 짓 안 할래요.”

글쎄, 난 반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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