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우리 남매들에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부부애이다.
나는 자라면서 부모님이 싸우시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엄마가 폭풍 잔소리를 했지만 싸움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아버지가 그냥 허허 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맏이인 언니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막내는 초등 2학년 때였으니 연령대에 따라 기억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오 남매의 일치하는 생각은 두 분이 무척 아끼고 서로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아버지한테 늘 붙는 수식어는 이북사람, 단신 월남 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어린 나에게 혼자, 외로움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외로워서 그러셨을까?
아버지의 안테나는 늘 가족에게 향해있었다.
집안의 대소사뿐 아니라 자식들 학교 선생님 면담까지 다 신경 쓰셨다.
다정하지도 유머도 없으셨지만, 존재 자체로 든든한 울타리였다.
특히 엄마는 늘 몸이 아파 아버지의 관심을 다 받으셨는데, 좀 유별나긴 하셨다.
엄마 대신 우리 집 살림을 해 주셨던 외할머니는 사위를 '마누라 밖에 모르는 사람,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칭찬인 듯 아닌 듯 평가하시면서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대해서 엄마가 세상물정을 아무것도 모른다고 혀를 차셨다.
아버지의 퇴근시간은 우리 오남매에게 공포의 시간이었다. 엄마가 그날의 잘못을 낱낱이 일렀는데 아버지는 엄마 말만 듣고 단체기합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죄명은 늘 엄마 힘들게 한 것과 형제끼리 싸운 것이었다. 혼내는 아버지도 야속했고 이르는 엄마는 더 미웠다. 우리를 혼내놓고 엄마 아버지가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두 분이 그렇게나 빨리 이별을 하려고 그러셨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는 아버지의 성함보다 '강상사'라는 호칭에 더 친숙하다.
또한 평생보직이었던 '인사계님, 선임하사님'이라는 직책에서는 아버지의 삶을 느낀다.
더 오래 사셨다면 더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셨을 텐데 그것만 강렬하게 새겨놓고 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엄마는 한동안 강상사 부인, 강상사 사모님이라고 계속 불렸는데, 그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강상사라는 말은 가슴에 묻기에 적당하게 되었을 때, 자식들이 '안여사'라고 불러주면 기분 좋아하셨다.
'강상사와 안여사'라는 말은 나의 아버지와 엄마 전체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의 금슬의 너무 좋아서 그랬을까?
두 분은 너무 빨리 이별을 하셨다.
아버지가 44세, 엄마가 41세 때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긴 '미망인 연금'은 아버지 분신이었으니 그토록 꼭 손에 쥐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혼자 남아 50년을 그리워하던 남편과 나란히 묻혀 사랑을 다시 독차지하게 되셨으니, 그래도 행복하실 거라 믿는다.
'강상사와 안여사' 연재는
그동안 머리로만, 가슴으로만 그리워하던 나의 부모님이, 어느새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는 것 같아, 기록으로 남기고자 쓴 글이다.
매주 옛 기억을 더듬으면서
어릴 때 황망히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동안 그리워할 새도 없이 살았는데, 이제야 아버지의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영원한 40대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비교적 같은 시간대를 공유한 언니는 내 글을 읽고 매 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의 세 남동생들도 부모님에 대하여 각기 다른 추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만의 오롯한 부모님과의 삶을 회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