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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Apr 25. 2022

정부의 존재는 정당한가?

자유지상주의가 던지는 질문

  이번에는 정치철학이다. 사실 내 주 관심분야는 아니긴 하다. 그럼에도 펜을 든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로, 철학의 대상에 성역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고정관념 중 하나일 국가의 존재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주요한 철학의 대상일 것이다. 둘째로, 내가 수업시간에 이 내용을 배우면서 겪었던 많은 번뇌의 과정을 여러분도 느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곧 나오겠지만 아래의 내용은 상식과 많이 다를 수 있지만 매우 논리적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아나키스트가 되지 않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며, 어쩌면 혹자는 아나키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얼마 전 디코에서 정치 드립 치면서 놀 때 자신의 정치색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소은이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정치 토론을 해!”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날 소은이의 정치색이 꽤 많이 밝혀졌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오늘 내가 던지는 질문은 정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과연, 국가의 존재는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한 가지 예화를 들어보자. 여기는 어떤 마을이다. 어느 날, 한 강대한 폭군이 마을을 침범한다. 모두가 두려워 떨던 그 때, 한 영웅이 등장한다. 마을의 영웅은 침략자의 목을 베고 모일시 마을의 안정을 지켰다. 그런데 다음 날, 영웅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집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는 자기가 이 마을을 구해줬으니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불쌍하고 착한 누군가는 또 달라는 대로 돈을 줬다. 그러나 조금 더 강단이 있는 누군가라면 영웅의 속셈을 따라줄 리 없다. 그러자 영웅은 시민을 공격했다! 때리고, 밟고,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가산을 탈취하여 받아야 할 액수를 채운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위의 예시에서 영웅의 행동은 과연 정당한가? 영웅이 폭군을 물리쳤을 때, 영웅의 보수는 약속된 적이 없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위의 예시에서 영웅의 행동이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잠깐 다른 길로 새자면, 이는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어떤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논할 때, 절대적인 정의 혹은 도덕률이 미리 정의될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논의하기에 앞서 모든 전제들을 정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많은 것에 대해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한 걸음 더 비약해보자. 과연 정부의 일은 위 예시 속 영웅의 일과 다른가? 물론 다양한 디테일이 다르다. 그러나 그거야 비슷하게 만들면 된다. 영웅이 강제로 수금한 돈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복지를 시행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행위의 디테일이 아니다. 강압적인 수금과 처벌행위 자체가 문제이다. 이 측면에서 위 예시의 영웅과 현실 정부는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영웅을 비난하면서 정부는 비난하지 않는다. 즉, 정부는 이야기 속 영웅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암묵적으로 정부가 어떤 특별하고도 정당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제 문제는 과연 정부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한 쪽은 권위를 갖고 한 쪽은 그렇지 않다면 이는 비상식적인 일이므로, 이를 주장하는 쪽이 입증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의 권위를 주장하는 쪽이 입증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한 많은 노력이 있어왔다. 나는 이하에서 이제껏 있어왔던 다양한 노력들을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일련의 노력들은 크게 사회계약론, 민주주의론, 정부의 유용성, 공정의 원칙,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계약론은 다시 크게 둘로 나뉜다. 전통적 사회계약론과 묵시적 사회계약론이다. 전통적 사회계약론의 경우는 크게 말할 것이 없다. 이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 인식 부재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사회적 계약을 통한 공동체가 없었으므로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단계 진보한 것이 묵시적 사회계약론이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사회적 계약을 이루고 있으므로 정부의 존재가 정당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질문 있는 사람?” 하고 물어보실 때, 학생들의 침묵은 ‘질문이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도 좋습니다.’라는 암묵적인 표현이다. 혹은, 음식을 주문하는 경우에도 일일이 동의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음식점 주인과 손님 사이에는 음식과 금액에 대한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하게 된다. 다른 경우를 보자. 이제는 몇 년 지난 일인데, 프랑스에서 한 중학교 교사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는 수업시간에 “이제부터 수업할 내용은 종교에 따라 불편할 수 있으니 듣고 싶지 않다면 나가도 좋다.”라고 말했다. 이 때, 수업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의 수업을 듣기로 동의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자리에 남아있는 것으로 동의를 표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행위에 참여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안 내면 딱밤을 맞기로 하고 가위바위보를 했다면, 가위바위보 행위 자체가 모종의 거래에 대한 동의로서 취급될 수 있다. 묵시적 사회계약론은 이런 암묵적 계약의 존재를 근거로, 정부의 존속 역시 이런 묵시적인 계약관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선 계약 자체에 대해서, 어떤 계약이 공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요건이 있다. 우선, 공정한 계약이 성립하려면 1. 합리적인 다른 대안이 있어야 하며, 2. 나의 행위가 영향력이 있어야 하고, 3. 계약에 대한 책임이 양쪽 모두에 있어야 하며, 4. 명시적인 거부의사가 없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존재에 관해 위에 네 가지 묵시적 계약 중 어느 것도 이런 필수요건들을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묵시적 계약의 비판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정부의 존재가 침묵을 통해 긍정된다면, 그것이 섣불리 정당하다고 말하기 전에 발언의 대가가 필요하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만일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얻는 불이익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아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정부의 존재가 일종의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것처럼 상호호혜를 바탕으로 하는 계약이라면, 어째서 모든 의무가 시민들에게 편중되어 있고 정부에게는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할 수 없다. 만일 정부의 존재가 자리에 참석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이 땅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정부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거주지의 주인은 시민이지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민을 내쫓는다면, 그거야말로 매우 부당한 행위이다. 나아가 정부를 인정하는 어떤 행위에 참여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투표를 하는 것으로 정부의 존재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정부의 존재를 거부하기 때문에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세에 아무런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부를 거부하고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부의 존속이 위태로워지지는 않는다. 즉, 개인의 선택은 영향력이 없다. 따라서 이 역시 불공정한 계약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론에 기초하는 학설도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다른 구성원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들 각자의 이익을 평등하게 증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거칠게 말하자면 다수결의 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누구 하나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 다른 모든 사람들이 틀렸고 자기 혼자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100명의 일반 시민들과 1명의 의사 중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을까? 100명이 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장하더라도 1명의 의사의 말이 더욱 귀할 것이다. 나아가 설령 100명의 말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수의 의견이라 한들, 그것이 소수의 사유권을 묵살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형은 정치적 의무를 설명할 수 없다.      


  이와는 달리, 개인들 각자의 이익을 평등하게 증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형이 있다. 이것이 옳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런 입장에 기초하여 수립된 정부는 평등한 이익증진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엄청난 반례가 한국사회에 있었다. 바로 ‘낙수효과’이다. 경제부흥을 위해 대부분의 이익을 몇몇 기업에 몰아준 결과 현재 한국사회는 재벌기업 중심사회가 되어 있다. 이것 역시 개인들 각자의 이익을 평등하게 증진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자명한 것일까? 이것은 비단 한국사회의 문제점만은 아니며 많은 정부들이 고의로 불평등을 야기하며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짧은 지식에 비추어 볼 때, 개발도상국의 경우 이런 현상이 훨씬 심하다. 즉, 이런 주장은 현실과 전혀 맞지 않다. 

     

  다음으로 정부의 유용성에 기초하여 정부의 권위를 설명하려는 입장을 살펴보자. 정부의 유용성에 기초한 논의의 핵심 요지는, 정부가 있기 때문에 나쁜 일들이 그나마 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정부가 존재함에 따라 얻게 되는 이익은 크게 세 가지인데, 범죄 억제, 사회적 규칙 마련, 군사적 보호를 들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정부가 존속되려면 시민들이 정부를 따라야 한다. 즉, 법을 지켜야 한다. 정부의 존속과 법의 준수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바로 시민들이 가진 궁극적인 의무 때문이다. 사람들은 몇몇 가치들을 증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테면 정의, 유용성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법이기 때문에 시민들은 법을 준수해야 한다. 말하자면, 정부를 따르고 법을 준수할 때의 이익이 그렇지 않을 때의 이익보다 크고 충분히 합리적이기 때문에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박이 가능하다. 하나는 정부가 존속되기 위해 모든 법들이 준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말 희한한 법들도 많을뿐더러,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무단횡단’을 범한다고 해서 정부의 존속이 위험하지는 않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일상적으로 법을 어기게 되면 정부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수는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법을 어긴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하게 될 경우 초래되는 사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일은 결과주의적 관점에서 일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살인을 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살인을 범하게 되면 당연히 정부의 존속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태를 아무도,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라지 않고 따라서 그런 일은 어차피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범법하는 것이 모두에게 썩 좋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사람은 법을 어길 수 있고, 개인의 범법행위는 정부의 존속과 무관해진다.     


  “공정의 원칙”에 기초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의무를 짊어지는데, 혼자서만 그 부담을 지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 공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조건은 여섯 가지이다. 1. 다른 사람들의 행위로 이익이 실현된다. 2. 그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은 부담을 진다. 3. 이 때 생산된 이익을 나 역시 공유한다. 4.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참여하면 나 역시 이익창출에 기여할 수 있다. 5. 이 경우 나의 부담이 합리적이다. 6.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없다. 이 여섯 가지 요건들이 충족되었는데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익창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않으며, 정부는 위의 여섯 가지 요건을 모두 만족하기 때문에 나는 정부의 존속을 인정하고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영웅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정부의 권능은 내용에 독립적이다. 그 내용이 어떻든지 오직 정부라는 이유로 그런 권능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여섯 가지 조건들은 이미 정부의 행위 내용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좋은 행위를 하지 않고 따라서 이익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공정의 원칙”에 기초한 정부는 곧바로 무너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가자.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정체에 대해 자유지상주의의 비판을 들어보자. 자유민주적 정치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권력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민주정체에 대한 옹호론이 주장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이다. 민주적 선출, 견제와 균형, 헌법으로 대표되는 기본권이 바로 그것이다. 철학적 무정부주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비판한다. 민주적 선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민주적 선출이라고 좋게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여러 이익집단의 각축전에 불과하다. 민주적 정체에서 모든 정치집단은 다수와 국민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사익에 급급한 이익집단이다. 게다가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은 합리적 평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것은 국민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건이 조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예로, 언론과 정부가 유착하는 경우 언론을 통해서 정보를 접하는 유권자는 결코 충분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모든 사안을 일일이 파악하기에는 국민들은 너무 바쁘고, 그렇다고 일 잘하는 사람을 잘 뽑는 일은 너무 어렵다. 게다가 언론은 말이 너무 많다. 자연히 민주적 선출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될 뿐이다.    

 

  견제와 균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역시도 끝끝내 성취될 수 없는 목표이다. 결국 민주정체는 승자 독식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정부는 많은 사안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현대의 정부는 더 이상 삼권분립이 온전하지 않으며(현 시대는 행정부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정부를 견제해야 하는 언론과 시민단체는 유착해서 더 큰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의 축을 담당해야 하는 여러 집단들이 함께 모여 제 배 불리기에 급급하므로 이 역시 불가능하다.     


  기본권에 대해 생각해보자. 모든 인간은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하며 이는 헌법에서 명시하는 바이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면 과연 그런가? 민주주의는 결국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보통 소수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어려움에 처한 소수는 크게 신경을 쓸 대상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심은 언제나 다수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국민들의 기본권을 해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타국민의 손해는 자국의 이익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이상에서 정부의 권위가 정당함을 보이려는 수많은 노력들이 부정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정부의 존재가 적어도 아직은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지하세계로 들어가 체제 전복을 꿈꾸는 레지스탕스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현재의 체제는 안정적이므로, 정부의 존재가 도덕적으로 악일 수는 있지만 아직 필요하다. 그런데 보다 좋은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자면, 나는 철학적 무정부주의가 제기한 여러 가지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대 사회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모순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정부가 많은 모순을 품고 있다면, 우선은 그것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 지붕에 물이 샌다고 집을 허무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행동이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류가 점차 진보한다면 미래에는 이런 무정부주의가 성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권위의 부당함을 깨닫고 정부를 없애고자 노력한다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적 나약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이다. 논리적으로 악하다 해서 없애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밤에 귀신이 나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유년의 습관 때문에 잘 때는 꼭 곰 인형이 있어야 자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대의 민주정부는 말하자면 인류라는 꼬마의 가장 작은 곰 인형이 아닐까. 나중에는 곰 인형이 없이도 잠들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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