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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경 Feb 19. 2023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나의 정체성

정체성 - 밀란 쿤데라



인간은 타인의 눈길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by 장 폴 사르트르



체호프 단편선을 보면 '관리의 죽음'이라는 에피소드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데요.


"어느 멋진 저녁 멋진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는 객석에 앉아 오페라를 보며 행복을 만끽합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재채기를 했고, 그 재채기로 인해 앞에 앉아있던 노인에게 침을 튀기는 일이 발생하죠. 앞자리의 노인은 옆 부서의 장군이었고, 투덜거리며 닦에내는 상황에서, 그는 사과를 해요. 하지만 그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전에 공연을 통해 느꼈던 행복감이 불안감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리고 괜찮다고 답하는 노인에게 지나칠 정도로 거듭 사과를 해요.  우리의 주인공은 계속 그 노인의 불쾌감을 상상하며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주인공의 계속되는 사과에 장군은 오히려 귀찮아 하는 상황이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장군의 접견실까지 방문해 계속 사과를 하죠.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계속되는 사과에 급기야 장군은 짜증을 냅니다. 이런 태도를 본 주인공은 장군이 사과를 안받아 준다고 생각하며 고민하다... 갑자기 다음날 죽어버리죠.


네..그렇습니다. 읽다가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사과를 안받아줬다고 갑자기 주인공을 죽이다니요;; ㅎㄷㄷ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체호프의 거침없는 스타일이자 유머임을 알게 되었어요. ㅎㅎ 체호프는 우리 인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거든요. 끊임없이 타인에게 영향을 받고, 타인의 반응에 수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신을 괴롭힙니다. 급기야 자신을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 이러한 타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 것이며, 인간 그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이 스스로를 얼마나 불안에 빠뜨릴 수 있는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관리의 죽음'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바로 타인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해요. 나의 진짜 정체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이고, 진짜 있기는 하는 것인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어볼게요.


어린 아들이 죽은 후 많이들 그렇듯, 샹탈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남편과 이혼해요. 그리고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를 만나고 동거를 시작하는데요. 그러던 어느날 샹탈은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슬퍼집니다. 그리고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라고 이야기해요. 여기부터 유명한 이야기죠. 남자친구인 장마르크는 샹탈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시라노'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샹탈은 낯선 남자의 편지를 받고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해요. 하지만 동시에 그 남자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며 점점 셀렘을 느끼기 시작하죠. 그런데 설렘을 느끼는 샹탈을 알게된 장마르크는 기분이 이상합니다. 분명히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시작했던 일인데,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설레어 하는 그녀에게 은근 질투가 나는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존재를 감추던 시라노가 결국 장마르크라는 것을 알게된 샹탈은 셀랬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동시에 남자친구에 대한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하죠. 정체성은 이렇듯 다양한 감정선을 쫓으며 각 사건들에 따른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나의 정체성

표지 그림부터 의미심장 합니다. 본인의 얼굴이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Nothing' 혹은 'Anything'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소설을 읽다보면 두 주인공 그와 그녀의 감정선을 따라 읽게 되는데요. 전반적인 분위기는 권태로움이고 샹탈은 주로 슬픔, 수줍음, 셀렘을 장마르크는 질투를 드러냅니다. 주인공들이 겪는 감정들은 모두 타인 혹은 환경에서 나오는 수동적인 감정들이 대부분 입니다. 샹탈이 남자들의 시선으로 자신의 여성성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 시라노의 편지를 받고 설렘을 느끼는 모습들은 나의 감정 그리고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좌우되고 정의된다는 이야기인데요. 타인의 말 혹은 주변환경(미디어 등)에 의해 나의 정체성이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현대인들을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타자다' by 라캉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소멸

현대인은 모든 사람이 비슷비슷해지고 너와 나의 차이가 없는 타자 저항성이 사라진 긍정성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신념이 각자의 독특함과 개성을 없애고 사람들간의 차이를 점점 줄이고 있죠.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 또한 사람들의 획일화는 나라를 넘어 전 세계를 획일화 시키는 중이구요. 그 결과 내 안에서 나를 찾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보다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 속에서 적당히 선택하는 삶을 살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일을 하며 삶의 열정을 느끼는 삶을 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즉, 열정적 삶의 소멸은 결국 나의 정체성 상실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적극적으로 나를 알아볼 필요가 없어요. 획일화된 현대사회는 이미 성공의 명확한 공식이 있다고 말하거든요. 그렇게 열정은 생겨날 필요도 없이 점점 상실되어 갑니다.



삶을 사랑하는 열쇠, 열정

열정은 소망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며, 선택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환장 같은 것이다.~ 진실로 무언가를 창조해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으나 마침내 이뤄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중간항로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열정을 발견할 것을 요구받는다. 우리를 삶으로, 우리의 본성으로 깊이 이끌어 아픔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 경험으로 우리는 새로이 변화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보잘것없는 잠정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언젠가 모든게 분명해지고 선택하는 일도 쉬워질 때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채 마흔이 되었다 - 제임스 홀리스>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 찾기

현재의 '나'는 어떤 열정적인 일을 하고 있나요? 무엇이든 자신이 생각했을 때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인생이 즉 나만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삶이 무기력하고 열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진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겠죠. 

며칠전, 누군가 독서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삶을 이끌리는 데로 살아온 자신에게 당장 시간이 주어져도 무엇을 해야 좋은지 모르겠다고 말이죠. 정말 책에서 나온 '무관심이 우리의 유일한 열정'이라는 말이 진짜였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자신에게조차 무관심한 우리들인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결국 열정을 발휘하고 싶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선행되어야 해요.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 다양한 경험과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길 위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낯선 길 위에서 바르게 걷고 있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의 길을 가는 일은 쉽지 않다. 안내에 따라 낯선 곳을 관광하기는 편하지만 자기 발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데 따른 보람은 주어진 길을 따라 똑바로 걷는 데에서 얻는 안락보다 더 소중하다.  <나를 찾아가는 철학 여행 - 유헌식>



다음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소개하려고 해요. 이번에 타인이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에 대해 알고, 나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요. 필요성을 알지만 방법에 대해 와닿지 않을 수 있어요. 사실 나에 대해 고민하고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자나요. 어떻게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지 데미안을 통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권태가 측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 권태의 양은 과거보다 훨씬 늘었다고 할 수 있지. 과거의 직업은, 적어도 대부분의 직업은 정열적 집착 없이는 생각할 수 조차 없었지. 그들의 땅과 사랑에 빠진 농부, 아름다운 탁자를 만들어내는 내 할아버지. 모든 마을 사람들의 발크기를 외우던 구두 수선공, 그리고 산지기, 정원사도 마찬가지였어. 당시에는 군인도 아마 정열적으로 사랑했을 거야. 삶의 의미는 문제되지 않았지. 삶의 의미가 그들의 공장, 그들의 밭에 그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공존했던 거야. 각각의 직업은 그 고유한 직업의식, 존재방식을 낳았지. 의사는 농부와는 다른 식으로 생각했고 군인은 초등학교 교사와는 다른 행동양식을 가졌지. 오늘날 우리는 모두 비슷해.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무관심하다는 공통점으로 균일화된 거지. 이러한 무관심이 열정이 된거야. 무관심이 우리 세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셈이지. <정체성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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