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실효환율 최저치가 드러낸 한국 경제의 민낯
원화 가치가 하락하며 환율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단순히 원·달러 환율이 올랐다는 현상을 넘어 국제 시장에서 평가되는 원화의 실제 구매력이 17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숫자 이면에 숨겨진 한국 경제의 체질적 변화를 읽어내야 할 시점이다.
환율판의 숫자보다 본질적인 지표는 실질실효환율(REER)이다. 물가 상승률과 주요 교역 상대국의 비중을 가중치로 반영해 화폐의 실제 경쟁력을 측정하는 이 지표는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지수가 낮아졌다는 사실은 세계 시장에서 원화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그만큼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명목 환율의 등락보다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이 약해졌음을 보여주는 엄중한 신호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는 대외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중동의 긴장이 고조되어 유가가 오르면 무역수지는 악화되고 국내 물가는 치솟는다. 이는 다시 원화 약세 압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형성한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과 주요국 통화 정책의 변화가 겹칠 때마다 원화가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부적인 자금 흐름의 변화도 무시하기 어렵다. 해외 주식 투자에 뛰어든 이른바 '서학개미'들의 행렬은 달러 수요를 상시적으로 자극한다. 국내 자산보다 미국 주식이나 채권을 선호하는 흐름이 고착화되면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려는 움직임이 구조화되었다. 재정 지출 확대로 인한 시중 유동성 증가와 맞물려 원화의 희소성은 더욱 낮아지는 추세다.
2008년 금융위기, 2015년 위안화 절하 사태, 2020년 팬데믹 초기 등 고비 때마다 원화 가치는 급락을 반복했다. 대외 의존도가 높고 외환시장 규모가 작은 한국 경제의 특성이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다른 통화들도 약세를 보이곤 하지만 원화의 하락 폭은 유독 가파르다. 위안화나 엔화와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기간이 길어지는 현상은 단순한 단기 변동을 넘어선 체질적 문제를 시사한다.
에너지 가격에 따라 통화 가치가 춤을 추는 노르웨이 크로네나 장기 저금리로 약세가 굳어진 일본 엔화의 사례는 각기 다른 원인을 가지나 외부 환경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한국의 상황과 닿아 있다. 한국은 자원 부국도, 기축통화 보유국도 아니기에 원화 가치의 하락은 곧바로 국가 경쟁력의 약화로 직결될 위험이 크다.
외환당국의 개입이나 금리 조정은 일시적인 진통제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 전반의 구조 개편이 동반되어야 한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공급망 다변화와 외환시장 개방성 확대가 논의되는 배경이다. 자본 유입을 유도할 수 있는 규제 완화와 기업 경쟁력 강화 없이는 원화의 제 가치를 찾기 어렵다.
원화 가치 하락은 기업과 개인의 일상을 직접 파고든다. 수입 물가 상승은 생활비 부담을 높이고 해외 여행이나 유학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장벽이 된다. 수출 기업에는 가격 경쟁력이라는 이점이 생길 수 있으나 원자재 가격 상승분이 이를 상쇄하는 경우가 많아 실익은 제한적이다.
결국 지금의 환율 문제는 우리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변화의 예고편이다. 이를 일시적인 소동으로 치부할 것인지, 근본적인 혁신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에 따라 향후 10년의 경제 흐름이 결정된다. 화폐의 가치는 곧 그 나라 경제의 성적표다. 지금 우리가 받아 든 성적표는 뼈아픈 반성과 대담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