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대신 통로를, 스페인이 던진 이민의 역설

경제적 실존과 사회 통합 사이, 가장 실용적인 해답을 찾아서

by 상식살이

국경 통제 대신 '제도권 편입'을 택하다


미국과 유럽 전역에 이민자를 향한 차가운 시선이 번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페인은 미등록 이주민에게 합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과감한 정책을 선택했다. 국경을 닫고 추방을 강화하는 경쟁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스페인 정부는 일정 기간 체류하며 범죄 이력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에게 거주권과 취업 허가를 내주기로 했다. 1년간의 합법적 체류를 시작으로 갱신을 통해 장기 거주와 시민권 취득까지 노려볼 수 있는 구조다. 이 정책의 수혜자는 수십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산업 현장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


스페인의 이러한 결정은 철저히 경제적 현실에 기반한다. 농업, 관광, 요양 및 돌봄 서비스는 오랜 시간 이주 노동력에 의존해 왔다. 팬데믹 시기 노동력 공백이 산업 현장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목격한 경험이 정책의 향방을 갈랐다.


유럽 중앙은행은 외국인 노동 유입이 생산성을 유지하는 핵심 동력이라 평가한다. 실제로 스페인은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팬데믹 이후 유럽 내에서 가장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이민 정책의 이중적 흐름


스페인의 행보는 인접 국가들의 행보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미국은 불법 체류자 단속을 대선 국면의 핵심 쟁점으로 삼았다.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처벌 수위를 높이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 내에서는 이민 제한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유권자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국경 통제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양상이다.


반면 독일은 숙련 인재 유입을 위해 이민법을 개정했고 캐나다는 점수제 시스템으로 젊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있다.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일본조차 간병과 제조업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외국인 체류를 점진적으로 확대 중이다.


안보의 논리에서 구조의 논리로


스페인은 이민을 단순한 치안이나 질서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노동 시장과 인구 구조를 해결할 열쇠로 재정의한다. 불법 체류 상태를 방치하기보다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세금을 걷고 사회보험 체계 안에서 관리하는 방식이 장기적으로 이롭다는 판단이다.


국방비 확대 요구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외부의 압박에 편승하기보다 내부의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합의를 우선시하는 스페인식 국가 운영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실용주의가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


선진국들의 이민 정책은 앞으로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걸을 가능성이 크다. 표면적으로는 불법 이주 단속을 강화해 정치적 갈등을 관리하는 한편 내실로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적 개방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스페인의 사례는 이미 사회의 일원으로 기능하는 이들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실용적 접근의 시험대다. 인구 구조의 변화 속도는 정치적 구호보다 빠르다. 이민 문제를 감정이 아닌 구조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미래가 열린다는 사실을 스페인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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