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중간, 초저가와 명품만 남은 시장

양극단으로 갈라진 K자형 소비 구조의 실체

by 상식살이

오늘날 소비 시장에는 '적당한 가격'이 사라졌다. 가격이 극단으로 갈린 상품만 살아남고 그 사이에 위치하던 중간 지대는 설 자리를 잃었다. 생활용품 매장에서 몇 천 원을 아끼던 소비자가 백화점에서 수천만 원대 명품을 구매하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생존과 경험으로 분리된 소비의 이면


고물가와 고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소비자의 행동 양식이 정교해졌다. 지출을 '생존을 위한 필수 지출'과 '자아실현을 위한 경험 지출'로 명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 생필품 영역에서는 단돈 백 원이라도 아끼려는 처절한 가격 전쟁이 벌어지는 반면 자신을 표현하는 영역에서는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초저가 시장의 팽창은 다이소 같은 균일가 매장의 매출 지표에서 확인된다. 단순히 싼 제품이 아니라 가격 대비 일정 수준의 품질을 보장하는 상품들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다. 대형 유통사들이 자체 브랜드(PB)를 앞세워 최저가 경쟁에 매진하는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의류 시장 역시 유니클로, 탑텐 등 SPA 브랜드가 생산과 유통 구조를 혁신하며 원가 통제력을 기반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자산 격차가 불러온 베블런 효과


반대편에서는 초고가 명품 시장이 견고한 성벽을 쌓고 있다. LVMH를 비롯한 글로벌 명품 기업들의 실적은 한국 시장에서 유독 빛을 발한다.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는 현실이 되었다. 수억 원대 보석과 한정판 제품이 출시와 동시에 완판되는 현상은 이제 일상적인 뉴스가 되었다.


이러한 소비 양극화는 소득과 자산 구조의 불균형에서 기인한다.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가격 상승의 수혜를 입은 상위 계층은 소비 여력이 확대되었으나 중산층 이하는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소득 정체로 인해 지출을 줄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소비 패턴이 자산 격차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셈이다.


K자형 구조가 던지는 경제적 경고


미국의 저가 유통업체 달러 제너럴과 초고가 브랜드 에르메스가 동시에 성장하는 현상은 글로벌 트렌드다. 유럽에서도 중간 가격대 브랜드들이 구조조정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례가 속출한다. 소비가 양 끝으로 이동하는 'K자형 구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소비의 쏠림 현상은 내수 경제의 체질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고가 소비는 해외 여행이나 수입재 비항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은 반면 중산층의 소비 위축은 지역 상권과 자영업자에게 즉각적인 타격을 입힌다. 중간층 소비의 증발은 경제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내수의 선순환 구조를 방해하는 신호로 읽힌다.


되돌릴 수 없는 패러다임의 전환


기업들은 이미 생존을 위한 포지셔닝 재편에 들어갔다. 생산 구조를 극한으로 효율화해 가격을 낮추거나 희소성과 브랜드 경험을 극대화해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갈린다. 어설픈 중간 가격대에 머무는 것은 시장에서 도태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지금의 시장은 소비자의 경제적 환경과 가치 판단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비용을 줄이려는 치열함과 자신을 증명하려는 과감함이 공존하는 시대다. 양극화된 소비 지형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구조적인 상수로 굳어지고 있다. 변화의 흐름은 명확하며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움직이는 시장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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