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도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우리를 위해 일부러) 빨간 안경을 끼고 찾아와 주셨다. / 사진 출처 : 부산문화회관
9월의 마지막 토요일, 나는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 2024 인문학 마스터 클래스-영화평론가 이동진 편에 참석했다. 과연 인지도 높은 평론가인 만큼 예매 과정은 쉽지않았다. 강연 3주 전에 슬 예약할까 폼을 잡았었는데 이미 만석이라 포기했다가, 그로부터 며칠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들어가 발견한 빈자리를 가까스로 예매할 수 있었다. 강연 당일,좌석은 역시나 만석이었고남녀노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동진 평론가를 보고 느낀 그의 인상은 박식한 만담꾼에 가까웠다.영화지식도 지식이지만, 무엇보다도 관중을 몰입시키는 말주변이나 상황별 유머가 청산유수였다. 본인 입으로 말이 많은 편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냥 지식을 죽 늘어놓듯이 말이 많은 것과 지루하지 않게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천지차인데 이동진 평론가는 확실히 후자에 속했다.
물론 애초에 나를 포함해 그곳에 모인 모두가 주말 오후에 각자 사비를 들여 참석할 만큼 영화에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 강연 자체가 지루할 수가 없는 주제를 다뤘지만, 내가 한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순히 영화 평을 하는 사람을 넘어 영화에 대해 얼마나 많은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거기서 어떤 집중과 흥미를 이끌어 낼 줄 아는 평론가였기 때문이었다.
영화 지식은 두 말할 것 없었다. 약 1만 편에 가까운 영화를 시청했다는 그는, 요즘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오래된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부터 역사, 그 시기 영화 및 배우가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 막힘없이 늘어놓았다. 게다가 이름 있는 평론가인만큼 각 매체에서 영화배우 및 감독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그와 관련된 콘텐츠를 다수 진행해서인지 영화와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 지식인의 강연을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어떤 분야든 관심 있는 만큼 알고 싶고, 또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다. 강연을 듣는 게 이렇게 재밌었던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영화연기는 물론이고 영화에 대해서도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시청할 필요가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쉬웠던 점은 강연 자체의 시간이 짧아 질응답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점이었다. 영화평론가가 되고자 한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좋은 영화란 뭐라고 생각하는지? 다음에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좋은) 영화 연기란 무엇인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사진 출처 : Britannica
'좋은' 영화 연기란 무엇일까? 감정이 폭발하는 연기? 극에 몰입시키는 연기? 눈빛연기? 메소드 연기? 다 좋지만, 사실 어떤 게 '좋은' 영화 연기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이동진 평론가는 그 이유를 연기 역사와 연기 방법의 예시를 통해 말해주었다.
그는 표식이다. 영화 연기의 역사는 브란도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 마틴 스코세이지
[대부] [지옥의 묵시록] 등 그는 몰라도 그의 영화나 캐릭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말론 브란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식 영화 연기를 (사실상) 시발하며 영화 연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배우였다. 흔히들 말하는 메소드 연기를영화에 내비치며 스타성을 이끌어 낸 첫 배우였던 것이다. 그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에게 있어 연기란, 특정 역할의 정해진 행동(그러니까 흔히 납득되는 보편적 행동)을 사실적이게 따라 하는 것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정신병자 역할이라면, 미친놈처럼 뛰어 다닌다던 가 침을 질질 흘리는 행동과 어눌하게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말론 브란도는 지금까지 으레 행해지던 영화 연기가 아닌, 자기 안에 내재된 것을 끌어내는 연기(배우가 배역에 빙의하듯해서 스스로가 그 인물로써 느껴서 내보이는 연기), 한마디로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며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물론 영화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본래의 형식적 극 연기가 아닌 내재된 감정에 충실해 연기를 했기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등 비판적 의견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래서 말론 브란도 이전의 연기는 다 좋은 연기가 아니냐?' 그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브란도 이후로 영화 연기의 틀이라는 것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당시의 배우들이 선보인 연기가 좋은 연기라고 평가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시] / 사진 출처 : KMDb
이번에는 영화 [시]에서 윤정희 배우의 연기를 생각해 보자.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에서 윤정희의 연기는 타 배우들과 달리 살짝 과장된 듯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을 안겨준다. 왜일까? 그 이유는 [시]라는 영화가 윤정희에게 있어 동시녹음으로 찍게 된 첫 영화이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알겠지만 [시] 이전에 마지막으로 찍었던 영화가 1994년작 [만무방]이었다) 그녀가 여태껏 찍은 모든 영화들은 동시녹음이 아닌 후시녹음으로 제작된 영화였던 것이다. 그녀가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의 영화제작과정에서는 아직 동시녹음 기술이 없었고 대부분 영상을 찍은 뒤 후시로 따로 녹음하거나 아예 성우가 녹음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의 영화배우들은 자신의 소리가 찍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연기를 할 때 표정이나 몸짓등에 더욱 집중했고 영상에서 그것이 잘 드러나도록 과장되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윤정희 배우의 연기 얘기로 돌아와서, 그래서 [시]에서 윤정희 배우의 연기가 어땠느냐? 그녀의 연기는 현 배우들과 연기 방법이 달랐을 뿐, 분명 좋은 연기였고 또 실제로 이창동 감독이 의도한 대로 잘 표현된 연기였다고 한다.
이 영상에 더 정확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궁금한 사람들은 찾아보길 추천한다 / 사진 출처 : 이동진의 파이아키
결론적으로, 어떤 게 뛰어난 영화연기냐 좋은 영화연기냐 하는 정해진 답이란 없다는 것이다. 메소드연기 역시 이걸 하는 사람이라 꼭 대단하고 연기를 최고로 잘하는 것도 아니다. 메소드 연기라는 것이 개인이 안에서 끌어내는 것이라 사람마다 다 다르고 종잡을 수도 없을뿐더러, 또한 '뭐가 정확히 메소드 연기이다'라는 것도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그 뜻이 매우 흐려졌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배우마다 자신이 가진 고유의 매력이 다르기에 그 배우 특유의 연기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영화에서 주어지는 캐릭터의 성격과 역할에 따라 연기의 느낌자체가 달라지기에 그 연기가 '어떤 연기 기법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 역시 애매하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최민식이나 김명민 배우의 연기와 송강호나 이병헌 배우의 연기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연기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가 메소드연기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배우 고유의 매력과 주어진 배역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최민식-[악마를 보았다], 김명민-[내 사랑 내 곁에]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배우는 그들이 아무리 역에 몰입하고 심취해 있다고 해도 결국 눈앞에 커다란 카메라와 다수의 조명을 두고, 연기라는 기교를 부리는 기술자들이다. 그 기술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기에, 중요한 건 배우가 자신이 참여한 영화 스타일과 본인의 매력에 맞게 그것을 얼마나 잘 쓰고 소화에 내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