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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경노 May 19. 2022

육아 인수인계

잘 읽는 아이로 키울 것.

나는 책을 좋아하던 평범한 아이였다.

주위에 대부분 친구들도 책을 좋아했고, 서로 책을 빌려주고 빌려 가는 게 자연스러웠고 재밌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친구 중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된 친구도 있고 책을 집필하는 작가도 있다.

회사에서조차도 자부 데이라며 금요일 퇴근길에 서점에 같이 갈 선배가 있다.

이것이 나는 내가 생각하는 평범함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독서는 자연스러운 것 일 뿐 큰 의미가 아니었는데 그 생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는 그저 내가 좋아 책을 읽어 주었고, 복직을 하고부터는 아이와 집중해서 한 권의 책을 읽어 주는 것으로 충만한 그 시간을 뿌듯해했는데, 그 사이 SNS에선 엄마의 책 육아, 북트리 인증샷,문해력에 대한 이야기 등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두 맥락은 같다. 결론은 아이가 풍요로워지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매체의 탓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 마저도 아이들이 해내야 하는 숙제나 인증처럼 느껴져 관련 포스팅을 이젠 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도 학생들을 압박하는 필독 도서 목록은 존재했고 엄청난 양의 전집도 존재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순 없다.

책을 가까이하는 환경은 부모가 만들며 그 결과는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거기에 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이 이따금씩 아쉽다.

그래서 늘 고민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갖는데 꽤나 흥미롭다.

조잘조잘 그 작은 입으로 어린이집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가끔 기상천외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책을 읽는 그 행위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흥미를 갖길 바라는 내 작은 마음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인데 의외로 웃음 포인트가 많다.


최근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고서에 일상적인 구어체를 쓰는 사람, 평소에도 사회적 효용 언어가 떨어지는 흔히 말하는 말본새가 없는 사람, 영수는 잘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은 이해 못 하는 아이, 싸움을 하면 자기 말만 하며 극으로 치닫는 부부, 특정 작품을 두고 꼴페미 라며 비웃는 현상, 이대남 이대녀로 칭하는 혐오의 정서… 이 모든 이야기는 문해력으로 정리가 되는 것을 느꼈다.


말이나 글의 요지를 모르고 일부 단어나 표현에 집착하며 본질을 바꿔버리는 사람들.

단순 개인주의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은 결론적으로 상대의 말이나 글을 읽어내지 못해 생기는 치명적 오류가 아닐까 싶다고들 했다.

유명한 정신의학박사가 찍은 공익광고를 보고, 사소한 아이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달라는 의미는 보지 못하고 해당 영상에 없는 부모의 사과를 먼저 요구하는 현상은 어쩐지 아이가 약자로서 미움받기 쉬운 존재가 된 것만 같아 쓴웃음이 났다.

부모가 없는 아이이거나, 실수한 장소에 사과를 해줄 부모가 없는 상황이라면 아이는 이해받을 수 조차 없다는 뜻이 된다는 것을… 진짜 모르는 것일까.

그 공익 광고는 맘충이라는 단어로 논란의 화력만 키우는 노 키즈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며 언제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작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댓글에 ‘우리도 누군가의 배려와 이해 속에서 컸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글이 참 마음을 때렸다.


만삭의 임산부였을 때나 유모차를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적이 있었는데 임산부나 영유아 동반자에 대한 배려는 해주면 고마운 것이지 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휠체어가 들어와도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내리거나 비켜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휠체어가 들어가는 그 틈을 비집고 자기 몸을 구겨 넣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이런 각종 논란 아닌 논란을 보며 사람들은 왜 더 극과 극으로 나뉘어 싸우게 된 건지 생각해보면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결여로 정리가 되었다.

작가 친구는 가끔 비상식적으로 화를 내는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네가 책을 읽지 않아서야.”

그러면서 친구는 말했다.

“아마 지금도 무슨 뜻일지 모를 거야. 책을 보지 않으니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전혀 이해하는 힘이 없어. 박사가 되면 뭐하니. 배우자 마음도 이해 못 해.”


책으로 돌아와,책은 그저 자연스럽게 읽던 것이지 큰 의미랄게 있나 했던 나는 그 큰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 책을 잘 읽을 수록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을 이해 하는 능력을 커지며 결국 그것이 우리가 사회인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감히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그러니 단순히 읽어내는 그 행위에 매몰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북트리 인증샷보다, 책을 읽던 그 순간 아이의 눈빛에 더 집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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