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괴물의 탄생: 범죄자의 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악의 씨앗은 타고나는가, 심어지는가?

by 흔들리는 전문가

진술녹화실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마주하는 것은 차갑고 건조한 정적이다. 그 정적 속에는 방금 전까지 세상의 지탄을 받던 한 인간의 거친 호흡과, 그가 저지른 행위의 잔상이 유령처럼 떠돈다. 사람들은 흔히 뉴스 속의 그들을 보며 괴물이라 칭한다. 그 수식어는 편리하다.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종으로 분류함으로써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상가의 시선으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볼 때, 나는 그곳에서 깊은 심연을 본다.


니체가 말했듯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지만, 내가 보는 것은 악의 화려함이 아니라 텅 비어버린 공동이다. 그 텅 빈 공간은 무엇으로 채워졌어야 했으며, 왜 채워지지 못했는가.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천착해온 질문이다.


악은 타고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은 인류가 도덕을 논하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논쟁이다. 유전학자들은 전사 유전자(MAOA)를 말하고, 법학자들은 자유 의지를 말하며, 종교인들은 원죄를 말한다. 그러나 진술녹화실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피의자의 생애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통계 수치나 교리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아픈 진실과 맞닥뜨린다. 우리가 괴물이라 부르는 이들의 시작점에는, 대개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세계와 그 세계가 남긴 뇌의 흉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뇌는 정직하다. 유전자가 설계도를 그린다면, 환경은 그 위에 집을 짓는 목수와 같다. 아무리 좋은 설계도라도 썩은 자재와 폭풍우 속에서는 제대로 된 집이 지어질 수 없다.


어떤 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환대받지 못했다. 부모의 원치 않는 임신이나 축복받지 못한 탄생은 아이의 신경계에 보이지 않는 거부의 낙인을 찍는다.

어떤 이는 젖먹이 시절 울음을 터뜨렸을 때 따뜻한 품 대신 차가운 방치와 마주했다. 생존을 위한 유일한 신호인 울음이 무시당할 때, 아이의 뇌는 세상에 대한 근원적 불신을 학습한다.

어떤 이는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폭력이라는 언어를 먼저 배웠다. 말이 아닌 매질로 의사를 전달받은 아이에게 타인은 소통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근원일 뿐이다.

어떤 이는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포식자에게 사냥당하는 경험을 했다. 근친상간이나 부모에 의한 상습적 폭행은 뇌의 방어 기제를 영구적으로 파괴한다.


물론 이것이 모든 학대받은 아이가 가해자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피해가 가해로 이어지는 고리는 결코 필연적이지 않다. 대다수의 생존자는 그 고통을 딛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강력 범죄자들의 삶을 역추적해 보면, 그들의 뇌가 발달해야 할 결정적 시기에 치명적인 결핍과 과잉 자극이 반복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방임, 폭력, 수치심, 그리고 애착의 전면적인 붕괴. 이 네 가지 요소는 인간의 뇌를 사회적 동물이 아닌 생존하는 짐승의 상태로 고착시킨다. 이는 도덕의 타락이기 이전에 생물학적 변형에 가깝다.

20260323_143333.png

인간의 뇌는 태어날 때 약 25% 정도만 완성되어 있다. 나머지 75%는 양육자와의 상호작용, 즉 경험을 통해 조각된다.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부위인 전전두엽은 가장 늦게까지 발달하며 외부 환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그중에서도 안와전두피질은 공감과 도덕적 판단, 충동 조절의 관제탑과 같다. 이 관제탑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유아기에 안전함이라는 기본값이 뇌에 입력되어야 한다. 아이가 울 때 누군가 달려와 달래주는 행위는 단순히 기저귀를 갈아주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아이의 뇌에 너의 고통은 의미가 있고, 세상은 너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경회로를 만드는 과정이다.


반대로 아이가 울 때 아무도 오지 않거나, 혹은 울음의 대가로 신체적 고통이 가해진다면 아이의 뇌는 생존 전략을 수정한다. 세상은 위험하고, 타인은 나를 공격하며, 나는 혼자라는 전제하에 신경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뇌의 경보 장치인 편도체는 극도로 예민해지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전전두엽과의 연결은 끊어진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뇌의 생물학적 적응이다. 공포에 질린 뇌는 공감을 배울 여유가 없다. 당장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생물은 멸종하기 마련이다. 학대받는 아이의 뇌는 24시간 내내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 전쟁터와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공감받아 본 신경계가 학습하는 고도의 지능이다. 누군가 내 아픔을 알아주었을 때 비로소 타인의 아픔도 보이기 시작한다.

타인의 고통에 눈물 흘릴 수 있는 능력은, 나의 고통이 타인에게 전달되었던 성공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 연결의 경험이 없는 뇌에게 타인의 눈물은 그저 액체일 뿐이다.

존중받지 못한 존재는 타인의 경계를 인식할 수 있는 신경학적 감각을 상실한다. 자신의 신체 주권을 침해당한 아이는 타인의 주권 또한 존중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진술녹화실에서 만나는 소위 냉혈한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하품을 하거나 손톱을 정리하곤 한다. 대중은 그 모습에 분노하며 악마라 손가락질하지만, 임상가의 눈에는 그들이 감정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 문맹자로 보인다.

'울면 더 맞았습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것이 유일한 생존법이었습니다' 라는 어느 수감자의 진술은 그가 단순히 참을성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뇌가 감정을 느끼는 기능을 스스로 거세했다는 선언이다. 감정을 느끼는 순간 공포에 압도당해 죽을 수도 있었기에, 뇌는 정서적 반응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는 뇌의 해킹이다. 외부의 가혹한 자극이 시스템의 기본 설정을 파괴하고 오직 생존 모드로만 작동하게 만든 결과다.

ChatGPT Image 2026년 3월 23일 오후 02_32_48.png

우리가 괴물이라 부르는 이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괴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괴물이 되지 않으면 숨조차 쉴 수 없었던 지옥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배워보지 못한 자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색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라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타인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하거나 제거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다. 그들의 전전두엽은 이미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찬 편도체에 의해 하이재킹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뇌를 가진 이들에게 도덕적 훈계는 소음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가 아니라, 망가진 신경회로를 복구할 수 있는 정교한 임상적 개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논의가 범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불우한 환경도 타인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사회는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며, 위험한 가해자로부터 구성원들을 단호히 격리해야 한다. 그것은 법치 국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응징과 격리만으로는 괴물의 탄생을 막을 수 없다. 한 명의 괴물을 교도소에 가둔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 어느 골방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또 다른 괴물의 성장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술녹화실은 이미 벌어진 비극의 종착지일 뿐, 그 비극이 시작된 곳은 평범해 보이는 우리 이웃의 집 안일 수도 있다.


진술을 듣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가장 불편한 진실은, 그 가해자 역시 한때는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했던 작은 아이였다는 점이다.

'맞을 때 진짜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사람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으니까요'라는 말은 한 범죄자의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무너져 내린 한 인간의 신경계가 내지르는 비명이다. 그에게 세상은 한 번도 따뜻한 안식처였던 적이 없다. 그에게 사람은 늘 뒤통수를 치거나 매질을 가하는 존재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뇌에게 도덕이나 윤리는 배부른 자들의 사치품에 불과하다. 그들의 시간은 학대가 시작된 그 시점에 멈춰 서 있다.


방임은 뇌의 사회적 회로를 위축시켜 타인과의 연결감을 영구히 훼손한다. 이는 뇌에 가해지는 가장 조용한 살인이다.

반복된 학대는 뇌를 상시 전쟁 상태로 만들어 사소한 자극에도 과잉 공격성을 띠게 한다. 이들의 뇌는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적의 습격을 기다린다.

수치심은 자아를 파괴하며, 그 파괴된 자아는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든다. 내가 가치 없는 존재라면 타인 또한 가치 있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문제는 그 잔혹한 환경이 종료된 후에도 뇌는 여전히 그 지옥 속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신체는 성인이 되었지만, 뇌의 회로는 여전히 5살 아이가 느꼈던 공포와 분노에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범죄는 단순한 탐욕의 산물이 아니라, 처리되지 못한 분노의 배설구이자, 무력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뒤틀린 방어 기제가 된다. 그들은 타인을 해침으로써 자신이 더 이상 무력한 피해자가 아님을 증명하려 한다.


이것은 뇌의 배신이다. 주인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결국 자신과 타인 모두를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 근원적인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괴물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그 답은 명확하다. 우리가 외면했던 곳,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그늘진 구석에서 괴물은 천천히 잉태된다.


경찰이 출동하기 전, 판사가 망치를 두드리기 전, 교도관이 철창을 닫기 전. 그 훨씬 이전의 시간 속에 답이 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아이의 울음소리, 아무도 닦아주지 않았던 아이의 눈물, 아무도 멈춰주지 않았던 가해자의 손길. 그 틈새에서 악의 씨앗은 뿌리를 내린다. 우리가 범죄자의 서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을 동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비극적인 연쇄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할지 찾아내기 위해서다.


임상가로서 나는 가끔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이미 굳어버린 뇌의 회로를 다시 배선하는 작업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더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막아야 하는 것은 범죄 그 자체 이전에, 범죄를 제조해내는 이 사회의 차가운 시스템이다. 한 명의 괴물을 향한 분노보다 중요한 것은, 한 명의 아이가 괴물로 변하지 않도록 그 손을 잡아주는 일이다. 진술녹화실의 모니터를 끄며 나는 생각한다. 저 피의자 뒤에 서 있는 수많은 어둠을. 그 어둠 속에서 여전히 떨고 있는 또 다른 아이들을. 그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일 아침 뉴스에서 새로운 괴물들의 이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괴물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 우리가 무관심이라는 물을 주어 키워낸 슬픈 열매일지도 모른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뇌는 차갑게 식어가고, 그 냉기는 훗날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흉기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한 명의 아이가 훗날 우리가 처벌해야 할 한 명의 괴물이 된다는 사실은 이 사회가 짊어져야 할 가장 무거운 부채다.


진술녹화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길, 복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그 그림자 속에 숨어 있을 수많은 '밤의 서재'의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펜을 든다. 이 기록이 괴물이 된 자들에게는 성찰의 거울이 되고, 아이를 키우는 이들에게는 경계의 지도가 되기를 바라며.


해킹당한 마음의 보고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뇌의 배신은 치명적이지만, 우리는 그 배신의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회복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 멈춰버린 시계의 바늘을 억지로 돌릴 수는 없지만, 새로운 시계를 조립할 자재를 공급할 수는 있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이자, 뇌과학과 심리학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희망이다. 우리는 한 명의 괴물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가슴에 새긴 채 밤의 서재 불을 끈다.


[전문가 코너]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범죄자의 뇌를 연구한 결과들은 매우 일관된 방향을 가리킨다. 특히 안와전두피질-편도체 회로의 결함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와 강력 범죄의 핵심 기제로 지목된다. 안와전두피질은 인간의 고등적인 의사결정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담당하는 부위로, 부적절한 충동을 억제하고 타인의 정서를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편도체는 원초적인 공포와 위협에 반응하는 뇌의 경보 센터다.


일반적인 뇌는 안와전두피질이 편도체의 과도한 흥분을 조절하지만, 심각한 아동기 트라우마를 겪은 뇌는 이 조절 기능이 약화된다. 편도체는 늘 위협을 느껴 과활성화되어 있는 반면, 이를 통제해야 할 안와전두피질은 발달이 저해되어 제 기능을 못 하는 것이다(Raine et al., 2000). 또한 해마의 위축은 감정적 기억을 시공간적 맥락에 통합하지 못하게 하여, 현재의 상황을 과거의 위협과 혼동하게 만든다. 이러한 뇌의 구조적 변화는 결국 공감 능력의 상실과 충동 조절 장애로 이어진다. 이는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생물학적 고장 상태에 가깝다.

따라서 범죄 예방은 뇌의 유연성이 살아있는 아동기에 적절한 정서적 지지와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임상가의 한마디

괴물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울음을 들어주지 않았던 시간,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시간, 아무도 멈춰주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진다. 그래서 어떤 범죄를 볼 때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는 한 명의 괴물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 아이의 뇌가 전쟁터를 선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평화의 조약을 맺었어야 했다.

화, 목, 토 연재
이전 07화6화: 독이 든 잔을 멈추지 못하는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