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심연을 기록하는 밤 : 나는 왜 상담실 밖으로 나왔는가
부제 : 25년 차 임상가가 보내는 초대장, 혹은 경고장
밤 10시. 도심의 소음이 잦아들고 건물의 공조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깔리는 시간이다. 마지막 내담자가 떠난 상담실은 기묘한 정적에 잠긴다. 조금 전까지 이곳은 누군가의 비명과 오열, 그리고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다 쓴 티슈 상자와 살짝 흐트러진 쿠션만이 방금 전까지 벌어졌던 심리적 사투의 흔적을 증명한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연다. 공기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이 쏟아내고 간 감정의 잔해가 그대로 내 호흡기 깊숙이 내려앉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동작은 지난 25년간 거의 의식 없이 반복해 온 습관이다. 상담실을 정리하는 행위는 공간을 환기하는 동시에, 내 마음의 경계를 다시 세우는 마지막 절차에 가깝다.
나는 2000년부터 타인의 마음을 읽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다. 임상가로 일한 시간, 진술을 분석하며 수사와 법정의 언어를 다뤄온 시간, 범죄심리를 연구하며 인간의 선택을 추적해 온 시간을 합치면 정확히 25년이다. 사람들은 나를 ‘전문가’라 부르고, ‘선생님’이라 부르며, 때로는 ‘마지막 희망’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심연의 기록자’라고 정의해 왔다. 내가 해온 일의 본질은 누군가를 섣불리 고쳐 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과 그 구조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담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끔찍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이곳에서 수백 명의 사람을 만났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용의자, 직장 상사의 교묘한 가스라이팅에 영혼이 마모된 사회초년생, 그리고 믿었던 가족에게 착취당한 뒤에도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 피해자들.
그들의 사연은 제각각 달랐지만, 고통의 본질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했다. 예측할 수 없는 악(Evil)과 보호받지 못한 자아(Ego)의 충돌.
오늘 밤, 나는 익숙하고 안전한 상담실 의자에서 일어나 ‘밤의 서재’를 연다. 폐쇄된 진료 기록 속에만 머물던 이야기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기로 결심했다. 누군가는 묻는다. 이미 세상은 자극적인 뉴스와 과잉된 감정으로 가득한데, 굳이 당신까지 보태야 하느냐고. 이미 충분히 시끄러운데, 왜 또 하나의 목소리가 필요하냐고.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는 이 기록을 시작한다.
25년 전, 내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의 ‘악’은 비교적 선명했다. 폭력은 물리적이었고 사기꾼의 거짓말은 서툴렀으며 범죄의 동기는 원초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악은 다르다. 훨씬 세련되고 지능적이며 무엇보다 ‘합법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소리 지르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지 않으며 법의 경계를 교묘히 비켜간다. 최근 상담실을 찾는 내담자들의 호소는 신체적 상처보다 ‘보이지 않는 칼’에 찔린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다.
“분명 제가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대화만 하고 나면 제가 가해자가 돼 있어요.” “법을 어긴 건 아니라는데, 저는 숨을 쉬는 게 점점 힘들어져요.”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 마키아벨리스트. 한때는 심리학 교과서 구석에 머물던 개념들이 이제는 사무실 옆자리, 연인 관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그들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 대신 죄책감을 유발하고, 이중 구속(Double Bind) 메시지를 던지며,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적 흉기를 사용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피해자의 판단력이다.
문제는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성실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규칙을 어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 ‘선량함’이 악에게는 가장 효율적인 표적이 된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무너진다. 이 과정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임상 현장에서 수없이 반복 관찰되는 패턴을 따른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피해자에게 묻는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왜 그때 거절하지 못했어?”
이 질문들은 문제 해결을 향하지 않는다.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가장 빠른 통로일 뿐이다.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해, 25년간 축적된 임상적 근거와 현장 경험을 들어 대신 싸우려 한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다.
서점의 매대에는 ‘위로’와 ‘공감’을 전면에 내세운 문장들이 넘쳐난다. 그것들은 지친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응급처치로서는 유효하다. 그러나 악의적인 공격 앞에서 막연한 긍정은 아무런 힘이 없다. 늑대 앞에 선 양에게 “너는 소중해”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늑대의 습성을 파악하고,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며, 빠져나올 경로를 확보하는 일이다.
그래서 ‘밤의 서재’는 불친절할 것이다. 나는 섣부른 위로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당신이 왜 울게 되었는지, 그 눈물이 만들어진 심리적 구조를 현미경처럼 분석할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거짓말쟁이들이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언어의 단서를 해부하고,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착취의 공식을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반응이 나약한 성격 탓이 아니라 신경계의 필사적인 생존 전략이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이곳은 낭만적인 서재가 아니다. 이곳은 심리적 전장(Battlefield)으로 나가기 전, 무기를 점검하고 전열을 가다듬는 작전 상황실에 가깝다.
나의 필명 ‘손연’에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덜어내겠다는(損) 다짐이 담겨 있다. 넘치는 해석과 도덕적 분노를 절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然)을 바라보겠다는 태도다. 동시에 내담자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連) 약속이기도 하다.
임상가로서 나는 중립을 훈련받았다. 그러나 피해자 앞에서의 중립은 종종 가해자에 대한 묵인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난 25년 동안 수없이 목격했다. 그래서 이 서재에서 나는 기계적인 중립을 가장하지 않는다.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선택을 예측하고 막기 위해서다. 악을 설명하되 변명하지 않는 것, 고통을 직시하되 압도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유지하려는 태도다.
밤은 깊어가고, 도시의 불빛은 하나둘 꺼진다. 그러나 어딘가에서는 오늘 겪은 부당함과 공포를 곱씹으며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서재가 그들에게 작은 피난처이자,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단단한 방패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생각보다 강하고, 악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그리고 진실은 기록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이 서재의 불은, 그런 믿음으로 켜두겠다.
심리학자가 타인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매일 들으면서도 온전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임상 현장에서는 상담가가 내담자의 트라우마를 깊이 공감하며 듣는 과정에서, 마치 자신이 그 일을 겪은 것처럼 심리적 고통을 느끼는 현상을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이라고 부릅니다.
저 또한 25년간 수많은 악과 마주하며 영혼이 소진되는 듯한 순간들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가들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승화(Sublimation)’라는 방어 기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예술이나 문학, 혹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변환시키는 것이죠.
저에게는 이 ‘글쓰기’가 바로 승화입니다. 제가 목격한 부조리와 고통을 머릿속에만 담아두면 독이 되지만, 그것을 분석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지식’으로 기록하는 순간, 그 고통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억울함과 고통을 혼자 삼키지 마십시오. 짧은 메모라도 좋습니다. 기록하는 순간, 당신은 상황에 압도당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실제 사례와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기록이며, 특정 개인이나 사건을 단정하거나 평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범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