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당신의 마음에도 상태창이 뜬다면

1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여자

by 흔들리는 전문가

명품을 입은 우울증 : 화

제 이름은 손연입니다. 똑바로 읽어도 손연, 거꾸로 읽어도 연손.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역삼역? … 들과 같은 고급 회문(回文)에는 못 끼지만, 어쨌든 저는 손연입니다.

직업은 임상가이자 진술분석전문가입니다. 의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약은 못 줍니다. 대신 마음을 아주 성실하게 뜯어봅니다(합법적으로요.)

사람들은 진료실 문을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힘드네요.”
혹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눈에는, 그들의 인사말보다 훨씬 정확하고 솔직한 것이 먼저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컴퓨터 오류 알림처럼,


내담자의 정수리 위 약 15cm 지점에 둥둥 떠오르는 [마음 상태창] 말이죠.


사람들은 표정을 잘 속입니다. 웃으면서 화낼 수 있고 울면서 “괜찮아요”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태창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눈꼬리 처짐 각도 3.5도, 목소리 주파수 250Hz에서의 미세한 떨림, “그냥…”이라는 단어의 분당 사용 횟수.

이 모든 정보가 0.3초 만에 제 뇌에서 합쳐져 하나의 진단서로 출력됩니다.

띠링— 하고요.(가끔은 저도 놀랍니다.)


오늘 오후 2시. 예약된 내담자가 들어왔습니다.


“또각, 또각, 또각.”


스틸레토 힐 9cm. 보폭은 좁지만 리듬이 빠릅니다. 교감신경이 이미 워밍업을 마쳤다는 뜻입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상담실의 공기가 바뀝니다.

습도 40%, 샤넬 No.5.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로 35cm, 세로 25cm,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H사의 명품 가방.

사람은…


가방의 옵션처럼 뒤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가방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지 않았습니다.

제 책상 위에 버젓이,,,


시야각 45도,
“여기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위치에 정중하게 전시했습니다. 그리고 턱을 15도 치켜듭니다.

영장류가 서열을 확인할 때 자주 쓰는 각도입니다.


“선생님, 저 길게 상담할 시간 없어요. 그냥 잠이 좀 안 와서요. 영양제 처방받듯이 약이나 좀 받으러 왔어요.”


이름은 박미주. 32세. 가명입니다. 입은 말합니다.


“나는 바쁘고, 유능하고,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제 눈앞에 뜬 시스템 창은 조금… 아니, 꽤 위험한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SYSTEM : 내담자 분석을 개시합니다. ]

닉네임: 박미주

• [머리] C사 선글라스 (방어력 +50 / 시선 차단)
• [손] H사 핸드백 (자존감 일시적 부스팅)
• [옷] 트위드 재킷 (세트 효과: 무시 완전 차단)

주요 스탯
• 허세 (Bluff): Lv. 99 (MAX)
• 자존감 (Self-Esteem): Lv. 1 (툭 치면 부서짐)
• 외로움 (Loneliness): Lv. 95

특이사항
가면 우울증(Masked Depression) 진행 중.
얼굴은 웃고 있으나, 편도체는 비상 회의 중입니다.


“미주 씨~!?”

“네? 말씀하세요. 아, 저 비급여로 해주세요. 기록 남는 거 싫어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립니다. 눈은 안 마주칩니다. 전형적인 회피형 방어기제입니다.


복어가 미리 몸을 부풀리는 것과 같습니다. 찔릴까 봐요.

허세 레벨 99. 희귀 몬스터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보고 “싸가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임상가입니다. 제 눈에는 다르게 보입니다. 저건 공격이 아닙니다. 방어입니다.

상처 난 어린 짐승이 “나 무지 쎄!” 하고 털을 곤두세우는 것과 신경학적으로 거의 동일합니다.

그녀의 명품들은 사치가 아니라 강철 갑옷입니다.

문제는…


그 갑옷이 너무 무겁다는 겁니다.
제 체감상 50kg쯤 됩니다. 안에 있는 자아(Self)는 지금 압사 직전입니다.


저는 차트를 덮고 선글라스 너머, 정확히는그녀의 동공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가방이 참 예쁘네요.”

“아, 이거요? 이번 시즌 신상인데 한국엔 두 점밖에—”

“아니요. 예쁜데… 너무 무거워 보여서요.”


라디오가 꺼지듯, 그녀의 말이 멈췄습니다. 핸드폰을 만지던 손가락이 1.5초간 정지합니다

(이건 꽤 긴 시간입니다.)


“그 가방 안에 돌덩이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 들고 서 있느라 비복근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어서요"


선글라스가 살짝 내려옵니다. 미간에 주름... 방어기제 재가동 신호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저 필라테스 해서 코어 좋아요.”


“그럼 더 정확하겠네요. 미주씨 마음속에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있습니다. 자기 몸보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들키지 않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요.”


저는 허공을 가리켰습니다. 그녀 눈에는 제가 허공에 삿대질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겠죠.


“지금 외로움 수치가 95입니다. 이 정도면요,,, 밤마다 혼자 울다가 과호흡 와서 기절하듯 잠듭니다.”

“이건 약으로 재우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지끈.

턱 각도 15도 → 0도.
다리 힘 풀림.


[ 시스템 알림 ]
• ‘허세’ 방어막 손상
• 내면 진실 노출 시작


그녀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습니다. 명품 립스틱이 번질 정도로.


“…선생님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무도 모르는데.”


“저는, 마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게 직업입니다. 미주씨는 화려한 게 아니라 아픈 겁니다.”


자, 저의 평가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갑옷을 벗길 차례입니다.

이 상담, 꽤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2부에서 계속)


[임상가의 메모]

허세는 들키고 싶지 않은 결핍의 그림자다. 그림자가 클수록, 빛을 갈망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화려함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이면의 무게를 한 번쯤 떠올려보자.

그리고 거울을 보자. 당신의 옷장에는 어떤 무게의 갑옷이 걸려 있는가.려한 갑옷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