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퇴행하는 자아(알코올 중독과 인지 저하)

블랙아웃과 인지저하

by 흔들리는 전문가

알코올과 자극적 콘텐츠는 어떻게 뇌의 전두엽 시스템을 부식시키는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있다. 그것은 어제 마신 술의 잔향을 감추기 위해 과도하게 뿌린 스킨 냄새와, 바짝 마른 입안을 가리기 위해 씹고 있는 강한 민트 향 껌 냄새가 기묘하게 뒤섞인 냄새다.


내 앞에 앉은 민석(가명, 38세)은 겉보기엔 완벽한 직장인이었다. 잘 다림질된 셔츠와 값비싼 시계. 그러나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기 위해 깍지를 꼈지만, 손끝의 떨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안면의 모세혈관은 확장되어 붉은기를 띠었고, 눈의 흰자위는 탁했다. 무엇보다 그의 영혼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느낌, 마치 전원이 꺼진 모니터 같은 공허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심리학적 평가보고서: 내담자 M의 기록

의뢰 사유 및 주호소

내담자는 최근 발생한 '블랙아웃(일시적 기억 상실)' 상태에서의 폭력적 행동으로 인해 아내의 강력한 권유로 내원하였다. 그는 며칠 전 회식 후 필름이 끊긴 상태로 귀가하여, 거실의 TV를 부수고 말리는 아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부서진 TV를 보고 도둑이 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자신의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성 기억 상실' 수준의 알코올 의존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술은 사회생활 하느라 마시는 거지, 중독은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으나, 면담 과정에서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고, 퇴근 후에는 스마트폰으로 자극적인 영상(불법 도박 중계, 선정적 콘텐츠)을 보며 혼술을 하는 습관이 수년째 지속되었음이 밝혀졌다.


성장 과정 및 생활사

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감정 표현을 억제하며 자랐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먹힌다'는 생존 규칙은 그를 유능한 회사원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의 내면을 고압의 압력밥솥처럼 만들었다. 그가 유일하게 허락받은 해방구는 술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술 잘 마시는 게 능력'이라 칭송받았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마다 알코올이라는 용매제에 뇌를 담가 현실을 지웠다. 최근에는 알코올만으로는 부족해,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마약을 함께 투여하며 도파민의 역치를 위험수위까지 높이고 있었다.


주변인의 목소리 (1) 아내

"평소에는 정말 점잖은 사람이에요. 목소리 한번 높이는 법이 없죠. 그런데 술만 들어가면 눈빛이 변해요. 7살짜리 떼쟁이가 되거나, 갑자기 짐승처럼 돌변해요. 다음 날 물어보면 기억을 하나도 못 해요. '내가 미쳤지, 다시는 안 그럴게'라고 비는데... 그게 벌써 10년째예요. 이제는 저 사람이 남편인지, 술 괴물인지 모르겠어요."


행동 관찰 및 신체적 징후

민석은 면담 내내 불안한 듯 다리를 떨거나, 물을 자주 마셨다. 교감신경계가 항진되어 나타나는 금단 증상의 전조였다. 그는 자신의 음주량을 묻는 질문에 "그냥 반주 정도 합니다", "요즘은 다들 힘들잖아요"라며 축소 보고하고 합리화하는 방어 기제를 사용했다. 인지 기능 검사에서 기억력과 주의 집중력은 연령 평균보다 현저히 낮게 측정되었다. 특히 전두엽의 실행 기능을 측정하는 검사에서, 그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거나 규칙을 자주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알코올이 뇌의 전두엽 피질을 물리적으로 위축(Atrophy)시키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의 뇌는 38세가 아니라, 통제력을 상실한 노인의 뇌를 향해 빠르게 늙어가고 있었다.


사고 및 정서 영역

그의 정서 시스템은 '조절' 버튼이 고장 난 상태였다. 평소에는 감정을 억누르는(Repression) 데 모든 에너지를 쓰다가, 알코올이 들어가 전두엽의 검열관이 퇴근하면 억눌린 감정이 폭발(Acting out)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인지 저하였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사고 회로가 마비되어, "지금 당장 기분 좋은 것", "지금 당장 화나는 것"에만 반응하는 1차원적인 사고 패턴을 보였다. 알코올과 숏폼 영상이 결합하여 그의 뇌를 '생각하지 않는 기계'로 개조하고 있었다.


주변인의 목소리 (2) 직장 동료

"김 과장님요? 술자리 분위기 메이커죠. 끝까지 남아서 마시는 스타일이고... 근데 요즘은 좀 걱정되긴 해요. 오전에 업무 지시한 걸 까먹으시거나, 회의 시간에 멍하니 계실 때가 많거든요. 손도 좀 떠시는 것 같고... 예전의 그 빠릿빠릿하던 분이 아닌 것 같아요."


확진 이전의 순간: 시스템이 멈췄어야 할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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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기억, 진실과 왜곡 사이에서 마주한 이야기들을 저서 《뇌의 배신》, 《흔들리는 전문가》 시리즈를 통해 서사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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