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폰

2200원의 여유

  이 업을 시작한 지 첫 해인 2010년대만 해도 개별 교실 전화기로 연결되는 직통 번호가 없는 시절이라 교실 유선 전화기로 외부와 통화하려면 회선에 여유가 있을 때만 가능했다. 외부로 나가는 통화가 많이 몰리는 기간이면 어쩔 수 없이 개인 휴대전화로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개인 번호가 알려지기를 꺼렸기에 여유 회선이 있을 때까지 맹렬하게 재발신, 재다이얼 버튼을 눌러대고는 했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핸드폰 번호가 알려지면 학생, 학부모로부터 카카오톡 게임초대를 비롯해 학교 생활과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을 담은 문자가 왔다. 050으로 시작하는 무료 안심번호를 발급받아 긴급한 경우에만 전화하라고 안내하자 문자 연락이 기본이 된 요즘 세상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연락을 하는 계기가 되었는지 불필요한 연락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핸드폰으로 발신하면 내 번호가 노출되므로,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을 때 받을 수 없는 상황이면 나중에 교실 유선전화로 다시 걸어 내 번호를 감추었다. 안심번호를 발급 받아 개인 핸드폰을 별문제 없이 사용하다가 별도의 업무폰을 사용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우연히 발생한 학교폭력사건 때문이었다.  

  치졸한 공방이 오가는 가운데 부모들 말만 듣고, 나의 언행을 추궁하듯 따져 묻는 교무부장도 못 미더웠지만, 한 술 더 떠 인간애를 상실하게 한 것은 A의 보호자였다. 학폭으로 넘어간 사안이면 완전히 손을 떼고, 관련 전화는 일절 받지 않았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퇴근 시간 이후에도 개인전화로 A의 보호자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어주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A의 학교 생활을 얘기하면서 모범적인 학생처럼 보호자가 말하길래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이제 하다 하다 '자기 자식에 대해 소설까지 쓰네'라고 생각했으나 차마 끊어버릴 수는 없어 의례적으로 “예예”라고 대답했다. 이 통화가 A의 평소 바른생활에 대한 담임의 동의 의견이라는 녹취록으로 꾸며져 가해 혐의를 부인하는 데 사용되었고, 며칠 뒤 교무실의 호출을 받아 이 녹취에 대한 경위서를 작성했다.     

  불특정 다수와 만나서 엮이기 쉬운 이 업에 대한 회의감과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다음 해에는 전담을 지원했다. 마침 전담 자리가 비어 있어 코로나 1년 차에 고독한 전담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담임이 맡아야 하는 지난한 업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업력 9년 차이면서 3번째 학교로 이동하는 해 2월, 별도 업무폰을 개통했다. 아이폰으로 넘어오기 전에 쓰던 안드로이드폰에 2,200원짜리 알뜰폰 요금제에 가입했다. 근무 시간에만 켜 놓고, 교실 외부로 이동할 때 같이 들고 다녔다가 퇴근할 때는 꺼버렸다. 물리적 차단 행위가 나와 일 사이의 심리적 단절에 효과적이어서 업무폰 사용은 정신 건강에도 좋았다. 인간사 어디나 똑같지만 나에게 호의적인 소수와, 별로 관심 없는 다수, 적대적이거나 결이 맞지 않는 소수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은데,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결된 사람은 업무 시간 이후에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껄끄러운 상대와의 갈등 상황에서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을 주었다.    

 

  코로나 이후 교실마다 개별 회선 전화기가 생겨 예전처럼 외부인과 통화할 때 번거롭지 않아 업무폰도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사용 빈도도 줄었다. 그래도 업무폰 회선은 그대로 살려둘 예정이다. 학생이 보호자와 사적인 통화를 교실 밖에서 할 필요가 있거나 교실 외부에서 보호자와 긴급히 통화할 때 여전히 유용하다. 생활지도에도 효과적인데, 개선이 필요한 상황을 찍어두었다가 바로 학생들에게 보여주면 문제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므로 꼭 필요한 잔소리를 짧고 효과적으로 할 수도 있다.

  보호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외부강사나 업체와의 협업에도 편리하다. 업무를 진행하면서 카톡으로 이미지 파일을 여러장 보내고 받거나, 여러 사람과 동시에 소통해야 할 때 카톡 대화방을 만들어 진행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개인폰이면 개인정보 유출 염려 때문에 조심스러운데 업무폰이 있다면 필요할 때 바로 마음껏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통신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