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냄새가 데려온 기억

by 꿈꾸는 피터팬


학교 대학원 수업이 저녁 여덟 시에 끝났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강의의 여운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칠판 앞에 서서 말을 이어가던 시간들, 학생들의 눈빛, 질문과 대답, 그 속에서 오가던 긴장과 집중이 수업이 끝난 뒤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하루의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아직 집까지 가야 한다는 피로가 함께 몸에 얹혀 있는 시간이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천천히 학교를 빠져나오면, 마음은 비로소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도 그랬다.
집으로 향하는 길, 혼자 운전대를 잡고 도로 위를 달리는데 차 안이 문득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창문을 조금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바깥 공기가 스며들어 왔다. 춥지 않은 4월의 저녁 공기였다. 차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봄밤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온기와 가벼움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긴장이 풀리고, 생각이 고요해지고, 하루가 비로소 끝나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 길은 도로 양옆으로 논밭이 펼쳐진 곳이었다.
낮은 땅과 어두운 밭,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 사이를 조용히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속에는 봄 냄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짚을 태우는 듯한, 나무가 아주 은근하게 타는 듯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짙거나 자극적인 냄새가 아니었다. 스쳐 지나가듯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냄새였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는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가만히 붙드는 기분 좋은 향기처럼 느껴졌다.


냄새라는 것은 참 묘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는데, 어느 순간 사람을 아주 먼 시간으로 데려간다. 생각으로는 잘 떠올리지 못하던 기억도 냄새 하나에 갑자기 또렷해진다. 그날 밤 창문으로 들어온 그 옅은 연기 냄새도 그랬다. 분명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맡았던 냄새. 그리고 그 냄새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이다.


어릴적 외할머니 댁의 나무아궁이로 생각되는 집은 참 소박했다. 편리한 것도 많지 않았고,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아마 불편한 점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그 집은 늘 따뜻하고 푸근한 곳이었다. 마당과 부엌, 장독대와 처마 밑, 오래된 나무문과 벽에 밴 생활의 기운까지, 모든 것이 한 덩어리의 정겨움으로 남아 있다. 그 집에서 피어오르던 아궁이의 연기 냄새는 단지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밥을 짓고, 물을 데우고, 식구들의 하루를 품어 주던 냄새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집의 냄새였고, 누군가를 돌보는 시간의 냄새였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냄새가 특별한 것인 줄 몰랐다.
늘 있는 것이고, 언제든 다시 맡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겼다. 외할머니 댁에 가면 있는 냄새, 겨울이면 더 진하게 풍기고, 저녁이면 더 따뜻하게 느껴지던 냄새. 아이는 늘 영원할 것 같은 것 속에서 산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언젠가 사라질 것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알게 된다. 어떤 냄새는 한 시절과 함께 사라지고, 어떤 풍경은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사라진 것은 기억 속에서만 조용히 살아남는다는 것을.


이제는 그 냄새를 실제로 맡아 볼 일이 거의 없다.
나무를 때는 아궁이는 시간의 저편으로 가 버렸다. 세상은 훨씬 편리해졌고, 삶은 더 깨끗하고 효율적이 되었다.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패고, 연기를 견디며 밥을 짓던 일상은 사라졌다.


그날 봄밤의 바람은 사라진 것들을 잠시 데려왔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특별한 말을 많이 해 주셨던 기억보다도, 오히려 그 집의 냄새와 공기와 온도가 먼저 떠오른다. 사람은 결국 어떤 말보다도 한 시절의 감각으로 기억을 간직하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아랫목의 감촉, 해 질 무렵의 부엌 소리, 마당을 스치던 바람, 그리고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냄새. 그것들이 모두 한데 모여 어린 시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나에게도 보이지 않는 위로가 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냄새의 추억을 떠올리면 그냥 좋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거창한 무엇을 남겨 주신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내 삶의 아주 깊은 곳에 오래 머무는 한 조각의 따뜻함을 남겨 주셨다. 나는 그분들 덕분에 어떤 봄 저녁 바람 앞에서 문득 행복해질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듯 지나가는 냄새 하나로 가슴이 뭉클해질 수 있다. 그것은 참 큰 선물이다. 살아가면서 마음이 메말라 갈 때, 너무 현실적인 것들에만 둘러싸여 있을 때, 이유 없이 다정해지는 순간을 불러오는 기억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문득 요즘 아이들이 떠오른다.
지금의 아이들은 커서 어떤 냄새를 기억하며 마음이 환해질까. 무엇을 맡았을 때 “아, 이 냄새” 하며 어린 시절의 기쁨으로 돌아가게 될까. 우리 세대에게는 흙냄새와 장작 냄새, 비 온 뒤 마당 냄새, 할머니 집 이불 냄새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자연스러운 생활의 냄새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집도 거리도 점점 비슷해지고, 냄새마저 인공적으로 정리된 세상에서 아이들은 어떤 감각의 추억을 품고 자랄까.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고,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물론 시대는 바뀌고, 추억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냄새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봄날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던 아파트 화단의 풀냄새일 수도 있고, 비 오는 날 학교 복도의 냄새일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 다녀온 여행지의 바닷바람 냄새일 수도 있다. 꼭 아궁이의 연기 냄새 같은 것이어야만 소중한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냄새 그 자체보다, 그 냄새와 함께 스며드는 정서일지 모른다. 안전하고, 따뜻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 아무 걱정 없이 숨을 쉬며 세상을 받아들이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런 장면을 남겨 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시간에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손에 쥐어 주는 것은 많아졌지만, 마음에 남을 감각의 기억은 오히려 적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좋은 교육도 중요하고, 넓은 경험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의 삶을 오래 지탱해 주는 것은 때로 아주 사소한 추억일 수 있다. 저녁 공기 속 냄새 하나, 함께 걷던 골목 하나, 어른의 손끝에서 느껴지던 따뜻함 하나가 오랜 세월 뒤에도 사람을 위로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었을 뿐이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거창한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수업이 끝난 뒤, 조금 피곤한 몸으로 운전을 하다가 창문을 열었고, 봄바람이 들어왔고, 냄새 하나가 오래된 기억을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도 그 짧은 순간은 하루 전체보다 더 깊게 마음에 남았다.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뜻밖의 순간들로 다시 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 시간이 남긴 향기는 문득 우리를 찾아와 조용히 어깨를 두드린다.


이렇게 봄날, 추억을 머금은 향기로운 바람은 스쳐 지나간다.
잡아 둘 수도 없고, 오래 머물게 할 수도 없다. 다만 잠시 창문을 열어 두고 그 바람을 맞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짧은 스침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오래 따뜻해진다. 잊고 지내던 얼굴들이 떠오르고, 사라진 줄 알았던 시간들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래서 봄밤의 바람은 늘 조금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에 더 애틋하고, 붙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더 깊이 남는다.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계속 앞으로 가지만, 때때로 어떤 냄새와 바람 속에서 뒤를 돌아보며. 그리고 그 뒤돌아봄 속에서 비로소 지금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으로 마음이 길러졌는지, 누구의 사랑을 먹고 여기까지 왔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날 밤 내게 불어온 봄바람은 단지 계절의 공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먼 시간 너머에서 다시 한 번 건네준 인사 같은 것이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느냐고, 그 따뜻한 시절이 네 안에 남아 있느냐고 묻는 듯한.


사월 어느 저녁 가슴 따뜻한 바람이 분다.

바람을 따라 기억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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