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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 소설
04화
다시 길 위에 서다(4)
by
동그라미 원
Oct 21. 2025
다시 길 위에 서다(4)
4부. 멈춰 선 시간의 흔적
삶에서 보이는 변화는 먼저 마음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3주째 상담이 이어졌다.
민우는 여전히 게임을 했지만,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담은 별 진전이 없어 보였지만 이미 민우의 마음에서는 굳게 닫혔던 창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상담사는 민우에게 종이와 연필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은 말로 하지 말고, 네 마음을 여기에 그려볼래?"
민우는 주저했다. 연필을 잡는 손이 어색했다. 거의 3년 가까이 연필이 아닌 마우스와 키보드만 잡아왔다.
처음 몇 분간 민우는 백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뭘 그려야 하지? 잘 그려야 하나? 이상하게 그리면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박 상담사가 조용히 말했다. "잘 그릴 필요 없어. 그냥 네 안에 있는 것을 꺼내봐."
민우는 천천히 선을 그었다. 겨우 그린 그림은 쭈그려 앉아 자신을 무섭게 쳐다보는 커다란 눈의 괴물(게임 중독)과, 그 옆에 작게 웅크린 자신의 모습이었다.
박 상담사는 그림을 보고 말했다. "네가 괴물에게서 도망치고 있다는 두려움이 보이네. 하지만 이 괴물은 네 안에서 나왔어. 민우야, 네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한번 그려볼 수 있을까?"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원하는 게 뭔지..."
"그럼 이번 주 동안, 딱 하루만이라도 게임 대신 다른 걸 해봐. 뭐든 좋아. 산책이든, 그림이든, 요리든. 그리고 그때 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록해 봐."
민우는 반신반의했지만, 약속을 지켰다. 수요일 오후, 민우는 게임을 켜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
거실로 나가니 햇빛이 눈부셨다. 얼마 만에 보는 낮의 빛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민우는 오래된 스케치북을 들고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처음엔 뭘 그려야 할지 몰라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머니, 자전거를 타는 아이,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는 청년.
그리고 민우는 연필을 들었다.
손이 굳어있었지만, 익숙했던 선들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공원의 나무, 벤치, 하늘. 서툴렀지만, 그리는 동안만큼은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게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음 레벨업이 언제인지, 길드원들이 뭐라고 할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그리는 것 자체가 좋았다.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상담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그림을 그렸다. 잘 그리진 못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게임할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않았고, 누가 날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그냥... 나였다."
다음 상담 시간, 박연화 상담사는 민우의 노트를 읽고 미소 지었다.
"민우야, 이게 바로 네가 찾던 거야. 게임 속 블랙 드래곤이 아니라, 진짜 너. 네가 그림을 그릴 때, 너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었어. 그 자체로 만족스러웠으니까."
민우는 처음으로 상담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선생님, 저... 디자인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그 순간, 민우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스스로 놀랐다.
그것은 게임 속 가상의 목표가 아니라, 진짜 '민우'가 원하는 현실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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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다시 길 위에 서다 (2)
03
다시 길 위에 서다(3)
04
다시 길 위에 서다(4)
05
다시 길 위에 서다 (5)
06
에필로그: 다시 길 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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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2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살면서 깨닫고 어려움을 극복한 마음들을 글을 통해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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