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의 언어를 넘어서, 기억을 지키는 일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역사를 두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들의 언어에는 묘한 냉소가 섞여 있다.
누군가는 일제강점기를 ‘근대화의 기회’라 부르고,
누군가는 독재를 ‘안정의 시대’라 말한다.
처음엔 터무니없는 왜곡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그 왜곡이 ‘합리적 의견’인 양 다뤄지는 현실을 보며 점점 분노가 차올랐다.
그들의 논리는 사실 빈약하고 허술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역사를 말하는 척, 기억을 지우는 방식으로 말한다.
'흩어질 말'인 줄 알았던 그들의 목소리는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과 정치선동가, 그리고 사유하지 않는 것을 쿨함이라 여기는 반지성의 분위기 속에서
서서히 역사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식민 시절,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미개한 땅의 근대화’로 묘사했다.
그들에게 역사는 지배의 논리를 세우기 위한 도구였다.
민족의 주체성을 지우면, 그들의 지배는 마치 ‘진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을 문명으로 이끈 은인’이라 자처했지만,
그 문명은 우리의 언어와 이름을 지워버린 문명이었다.
이것이 식민사관이다 —지배의 폭력을 ‘은혜’로 포장하고, 역사의 고통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정당화하는 방식.
가끔, 그때의 논리가 지금 다시 반복되는 듯한 기시감을 느낀다.
‘뉴라이트’라 불리는 이들이 식민의 그림자를 덧칠하며
“팩트로 말하자”는 구호 아래, 기억을 흩트려 놓는다.
그러나 그들의 ‘팩트’에는 인간이 없다.
숫자와 통계는 남지만,
존엄과 고통의 서사는 지워진다.
민족사관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국뽕’이라며 감정적이라고 비판한다.
“이제는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속에는 ‘감정은 비이성적이고, 그러므로 불필요하다’는 오만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이 없는 객관이 과연 가능할까?
민족사관은 감정의 발화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존재를 지워지지 않게 하려 했던 의지의 기록”이다.
그들의 신념과 고통, 눈물과 침묵이 모여 우리가 지금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존엄의 기억이다.
역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존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3. 역사를 지킨다는 것은 현재를 지키는 일이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지만, 그 왜곡은 언제나 현재를 흔든다.
과거를 덮는 이들은, 결국 현재의 불의를 정당화하려 한다.
그들은 과거의 권력을 미화함으로써 지금의 불평등과 폭력을 ‘당연한 질서’로 만들려 한다.
역사 공부는 분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기억을 지키는 일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우리가 겪은 고통과 회복, 패배와 연대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 사회가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민족사관은 배타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타인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세계사와 만나야 할 필요는 있지만, 그 만남의 전제는 ‘우리’를 잃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를 사랑하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누군가 “그건 오래된 감상”이라 말할지라도,
“역사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존엄은 언제나 기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또 누군가가 “그건 과거의 일”이라 말할지라도,
“아니요, 그건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의 일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