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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앞 30날」17

17/ 14 / 마지막 출근

by 구보라

2018년 8월 14일은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2016년 1월 6일 첫 출근했던 직장.


‘3개월 계약, 10개월 계약... 그렇게 잠시 있다가 떠날 회사가 아닌, 확실한 소속감을 가진 곳에서의 경험의 저변을 확대해나가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회사에 냈던 자기소개서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계약직이 아닌 첫 정규직 직장이었고, 좋아했던 곳인데 결국은 그렇게 떠났다. 그렇기에 많이 아쉬웠지만, 당시 나를 힘들게 했던 편집국장을 생각하면 후련했다.


이번 글은, 글의 모음이다. 마지막 출근일을 떠올리며 퇴사하고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퇴사하기 전 썼던 메모, ‘편집국장에게 들었던 말’ 메모, 당시 회사 대표에게 보냈던 문자 그리고 마지막 출근일 사진을 모았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제외한 메모들은 폰 메모장이나 노트북에만 저장되어있던 내용들. 이렇게 '14'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계기로 처음 꺼내어본다.


1. 2018년 8월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안녕하세요, 저의 안부를 전하기 위한 글을, 오랜만에 긴 글 올려봅니다!


제가 8월까지만 PD저널 기자로 일합니다! 남은 연차가 열흘 가량이라, 사실 지난 화요일(14일)이 마지막 출근이었습니다. 남은 8월은 연차 소진의 시기입니다.


2016년 1월 6일부터 PD저널에 출근했으니, 여기서 기자로서 2년 8개월 일을 했네요.

‘PD저널’에서만 쓸 수 있는 기사를 쓸 때에 기분이 좋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인터뷰, 리뷰, 기획기사가 특히 좋았습니다. 단신 기사를 쓰더라도 뭐든지 함께 소통하는 선배들이 있었고, 동료가 있어서 더 일할 맛이 났습니다. 사실 기자를 오래 지망하거나 준비했던 적이 없던 저인데도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가고, 끊임없이 성장해나가는 기분을 느껴서 보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쓴 기사에 대한 나쁜 피드백들을 받거나, 하고싶은 기사 들을 제대로 기획할 수도 없었어요. 매일매일 갈아넣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미 조금 지난 일이지만, 다시 이 문장들을 쓰는 것만으로 8개월 동안의 괴로움이 생각나네요. (저 긴 시기 동안 저의 괴로움을 다 들어줬던 친구들, 주위 사람들 고맙습니다...!)


하지만 소중한 저의 밥벌이니깐, 8개월을 적응하고 버텨보려고 애쓰고 애쓰고 애썼어요.... 그리고 7월 초, 퇴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하튼 7월 말쯤에야 확실하게 퇴사일, 마지막 출근일을 정했습니다. 드디어 이제 그만두는구나 싶어지면서 그때부터는 ‘앞으로의 나’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 이제 잠시 재충전하고, 공부의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앞으로는 꼭 좋은 사람과 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게 저의 다음 목표입니다! 물론 좋은 사람만 있는 회사는 없단 거 압니다. 하지만, 부당한 일이나 사람을 마주했을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시스템이 있으면 돼요. 그걸로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퇴사일이 늦게 정해지면서 8월 초부터에야 퇴사 소식을 알린 것 같아요.


취재하며 오가거나 전화로 퇴사 소식을 알렸을 때에, 모두들 응원과 격려를 해주셨는데 그 말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힘들었겠네", “퇴사가 힘든 결정이었을텐데, 결정하느라 고생했다”, “구 기자는 앞으로 무얼 해도 다 잘 할 거다” 등등... 이런 따스한 말들을 들으며 기운이 많이 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좋은 분들을 참으로 많이 만났구나 싶었습니다. 취재하면서 만난 분들, 너무 감사했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앞으로 PD저널 기자 아니더라도, 앞으로 볼 사람들은 계속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 혹시 제가 보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연락주셔도 좋구요 ㅎㅎ 차 한 잔이든 밥 한 끼든, 술 한 잔이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15일은 남은 짐도 챙기고 마지막 기사도 다시 고치러 회사를 갔었어요.


짐이 가득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 괜히 한 번 책상 사진도 찍어보고 그렇게 나왔습니다. 이렇게 끝이 있으면 새로운 시작도 있겠지라는 마음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퇴사하기 전, 6월 메모 중에서


2018.06.28.목


- 운동을 하고 왔다. 9시에 퇴근하고서 5분쯤 버스를 탔는데 집에 오니 43분. 꽤 빨리 온 셈이지. 그래서 짐 두고, 이 닦고 바지만 갈아입고. 불광천으로 갔다. 가니까 좋더라. 사람들도 꽤 많고.


걸으면서 생각하다 보니, 퇴근길에 읽었던 미디어오늘 기사가 떠올랐어. 2018.06.27. [뉴데일리경제 신입기자, 폭언·모욕 시달리다 퇴사- 사수 ‘짐짝이다’ ‘건방진 소리하면 죽여버립니다’ 폭언… 피해기자, 회사에 청원넣고 퇴사]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3324


"<A씨는 청원서에서 “선배의 강압적 태도에 바보처럼 받아들이기만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이 과정에서 억울함, 무력감, 우울, 자괴감이 들었다. 교육과 질책은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기사 중에서)


청원서를 올리고 퇴사했다는데, 청원서를 올릴 곳이라도 있었다는 게 부럽더라.


그래서 걸으면서, 나도 내가 들었던 모욕적인 발언, 폭언들을 제대로 정리해야지 싶었다. 업무문서를 다 살피고, 일기도. 그래도 글로 한 편 써야지. 그냥 있진 않을 거야.


“"지시를 제대로 이해 못"했단다.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해". 게다가 "기본기가 전혀 안됐다고 판단될 때"를 언급하는데 이건 철저히 자의적 판단이다. 기본기가 전무한 상황도 아니고 그렇게 판단된다니. 그럼 그 판단의 기준은? B씨가 하는 말들이 저 모양인 것은 그 자신을 주체이자 객체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체로의 격상 시도는 B씨의 관점에서 피해자 A씨를 봤을 때 느낀 것 위주이기 때문에 실패한다. 당장 A씨가 그렇게 문제가 많았다면 사측에도 해당 노동자의 자질을 문제 삼아야 했고, 이로 인해 업무상 어떤 애로사항이 발생했는지도 밝혀야 했는데, 결국 B가 한짓이 뭔가? 사람을 괴롭힌 것이었다. 이게 올바른 일처리가 아님은 본능적으로 알지만 이게 우리 주변에 만연한 일들이라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다.” (기사 중에서)


맞아. 그렇게 문제 많으면 차라리 문제를 삼든가. ‘괴롭힘’이지. 괴롭힘. 일상에 만연한 일들.


3. ‘편집국장에게 들었던 말’ 메모 중에서


-2018년 4월 2일

“자기 몫을 안 하면 하고 싶은 기사는 할 수 없다.”

“수습 때도 배우는 거다.”

“외부 나가면 1시간마다 보고해라.”


-2018년 6월 27일.

“보라씨 어디 옮길 데 정해졌어?

보라씨 지금 심각한 상태야.

왜 이렇게 무기력해? 이야기나 들어보자.

3년차인데 많이 느린 거 알지?

방심위 넘긴 것도 보라씨가 못 해서야.

이렇게 출입처 뺏기면 보라씨 있을 자리도 없어.

지금 자리도 뺏길 수 있어.

내가 이번엔 이 정도로 넘어가지만,

다음번엔 다른 불이익 주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보라씨 예전 기사들도 보면 잘 쓴 거 아냐.

그런 기사들을 그대로 승인한 데스크도 무책임하다고 생각해. (잘 한 거 아니라고 강조)

분발하라고.”


(*글쓰면서 추가. 이 발언들은... 다시 봐도 화가 난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그냥, 고스란히 듣고 있던 내가 너무... 슬프기도 하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지났다고 잊을 순 없다.)


4. 당시 PD연합회장에게 보냈던 문자 중에서 (참고: PD저널은 PD연합회에서 만든 언론사)


하루하루 마음이 괴롭고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매일매일 ‘못한다’는 말을 들으며 기사를 수정하고, 수정당하고, 할 수 있는 기사의 범위가 줄어들고, 다시 또 질책당하는 일이 무한 반복되어왔습니다. 소모되고, 갈아넣어지는 기분이랄까요.


저 스스로는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저 혼자만 ‘바보’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퇴사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고민을 하면서, 저는 일을 하면서 무엇보다도 ‘사람’과 ‘성장’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특히나 멘토가 될 수 있는 선배의 존재가 매우 중요합니다. 배우고 성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PD저널에서는 인간적인 관계도, 일적인 관계에서도 기대감이 없습니다. PD저널에서 좋은 선배, 동료들과 수평적인 분위기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계속 다니다가는 비교만 할 것 같아요. 끝없이 배우거나 성장할 수 없는 환경도.. 회사를 떠나는 이유입니다.’


5. 마지막 출근일, 저녁


친구랑 을지로 을지식당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맛있는 음식과 맥주. 환한 웃음. 이직할 곳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했지만. 그래도 그날만큼은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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