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같은 사람, 김환기(1913–1974)

그리고 그가 사랑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며 이어간 김향안...

by 피노

2024년 9월, “김환기는 김환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표제를 단 경매 기사가 화제가 됐다. 20세기·21세기 미술 이브닝 경매에 김환기의 1971년 전면 점화 〈9-XII-71 #216〉이 출품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가격이 곧 가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본의 질서 속에서 그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로 불렸고, 최근 5년간 한국 작가 최고가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말년의 푸른 전면 점화 〈우주(05-IV-71 #200)〉는 132억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최고가를 기록했다. 화면 가득한 점들은 다양한 푸른 색조로 떨리듯 번지며 반원형의 소용돌이로 뻗어 나가, 시야를 점차 바깥으로 확장시킨다. 그의 작품 제목은 제작 시작 날짜와 일련번호를 따른다. 곧 〈우주(05-IV-71 #200)〉는 1971년 4월 5일에 시작한 김환기 작가의 200번째 작품이라는 뜻이다.


유영국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로 꼽히는 김환기는 자연을 점·선·면의 순수한 요소로 환원해 서정의 세계를 빚어냈다. 셀루리언 블루, 울트라마린, 프러시안 블루… 그에게 푸른색은 상징이었다. 신비로운 색감이 응축된 화면은 깊고도 아득한 우주의 공간을 환기한다. 그는 미세한 색점의 음영을 무심한 듯, 그러나 끝없이 찍어 나갔다. 점 하나하나에는 인연과 자연, 음악과 고향의 바다와 하늘에서 길어 올린 기억이 스며 있다.


안좌도 대지주의 아들로 자란 그는 니혼대학 예술학부 재학 시절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들어갔다. 아방가르드는 전통과 질서를 과감히 비껴가 새 형식과 사상을 시험하는 미래를 향한 태도다. 당시 연구소는 외부 세계의 재현보다 화가의 상상으로 창안되는 추상을 갈망했다. 김환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상과 추상을 섞은 ‘반추상’을 모색했고, 그리움의 결을 따라 ‘조선의 미’를 스스로의 언어로 붙잡으려 했다.


아버지의 별세 뒤 그는 받은 유산으로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하고 땅문서를 돌려주었다. 사랑이 없던 첫 혼인도 정리했다. 상처를 지닌 이들만이 서로를 진정으로 어루만질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무렵 서른 두 살의 그는 "우리 같이 죽을래?"라고 고백했던 이상과 사별한 스물아홉의 동림(훗날 김향안)을 만난다. 사별과 이혼의 아픔을 품은 변동림과 김환기는 서로의 아픈 과거를 끌어안으며 부부가 되었다. 조선의 미를 찾아 헤매던 김환기는 백자에 마음을 쏟았고, 집이 ‘항아리집’이라 불릴 만큼 백자를 모았다.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 그의 고백처럼 항아리는 화면 속에서 ‘달항아리’로 떠올라 수많은 현대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김환기는 자신의 예술을 파리에서 시험받고자 했다. 이를 알아차린 김향안은 1955년, 그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홀로 파리로 향한다. 소르본과 에콜 드 루브르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익히고, 화단의 인사들과 교유하며 아틀리에를 마련한 뒤 아홉 달 만에 남편을 불러들였다. 집 한 채 남은 재산까지 처분한 마흔넷의 김환기는 그렇게 파리로 건너갔다.

“아침 9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경으로 날마다 붓을 들었다. 앞이 캄캄한 절벽 끝에 서서 붓을 드는 심정.” 그는 하루 10~15시간을 작업에만 몰두했다. 3년 동안 200여 점을 쏟아낸 그의 화면에는 동양 고미술과 서양 미술의 조화, 매와 새, 달이 간결하고 사랑스럽게 구성된 세계가 완성돼 갔다. 불어를 모르는 남편을 위해 김향안은 자료와 기사를 번역하고, 홍보와 관리를 도맡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기 공부를 이어가던 그녀의 협력 덕분에, 그는 오롯이 그릴 수 있었다. 파리에서의 3년을 마무리하며, 〈달 두 개〉에서 마침내 ‘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1963년, 그는 홍익미술대학 학장직을 내려놓고 뉴욕으로 떠났다.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았지만 형편은 넉넉지 않았고, 전시는 뜻대로 열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66년 한 화랑에 출품한 30점이 화랑 주인의 잠적과 함께 통째로 사라지는 일까지 겪는다. 재료를 살 돈도 없어 신문지나 전화번호부에 그림을 그렸고, 김향안은 글 대신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일해 살림을 도왔다.


뉴욕에서 7년. 점을 찍고 또 찍는 인고의 시간이 켜를 더할수록, 그의 화면은 달항아리처럼 더 텅 비어, 더 온전히 충만해졌다. 순면 캔버스를 가득 메운 무한의 푸른 점—‘점의 우주’가 탄생한다. 그 우주는 그리움의 산물이었다. 타지 뉴욕의 몰이해 속에서 누적된 외로움과 고독, 고향과 벗들을 향한 마음이 점점이 배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1969)


이후 그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인 ‘점’으로, 인간에게 영원의 신비로 남는 ‘우주’를 캔버스에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40년 만에 뉴욕에서 인정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 ‘점화’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뒤로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그는 매일 하루 종일 점을 찍었다. 삶의 남은 시간을 예술과 바꾸듯이. 1974년, 척추 디스크 수술 후 병원 측의 실수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그는 뇌사 상태에 빠진다.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다.” — 김향안


김향안은 그가 사랑했던 행위들을 이어 갔다. 그가 잊히지 않도록 국경을 넘나들며 전시를 열었고, 작품을 고국에 보내고자 했던 그의 바람을 잇기 위해 1992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개관했다. 건물의 구조와 형태, 창의 위치 하나까지 세심히 살피며 완성한 그 공간을 남겨두고, 2004년 그녀는 그의 곁으로 떠났다.


김환기의 점화는 단색조와 동일 행위의 반복이라는 특성으로 1970년대 단색화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고, 오늘의 젊은 화가들에게도 여전히 영감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전시 현장에서는 관람자의 ‘nostalgia(향수·과거의 그리움)’를 환기하기 위해 후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환기미술관은 소리와 향 등 여러 감각을 더해 그의 세계로 관람자를 이끌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김환기의 방’ 역시 향을 도입해 정서적 공명을 확장하는 큐레이션을 시도하고 있다. 자연·하늘·점(우주)의 정서를 관람자의 개인적 기억과 잇는, 몰입의 전략이다.


우주 같은 사람 김환기.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을 기억하며 이를 끝내 이어 간 김향안.

서로가 있었기에 비로소 완성된 그들의 우주는 오늘도 누군가의 가슴에 묵직한 그리움으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