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크냐, 블로끄냐

헷갈리는 러시아어의 한글 표기; 왜?

by 김양훈
러시아어의 한글 표기가 '블로크'와 '블로끄', '도스토옙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번역의 실수가 아니라, 러시아어 특유의 발음 체계와 이를 한국어라는 전혀 다른 음운 체계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기술적 한계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이유: 세 가지 핵심 정리

1. 무성 파열음의 처리: 'ㄱ'인가 'ㄲ'인가?

가장 흔한 혼란인 '블로크(Blok)'와 '블로끄'의 차이는 러시아어 자음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러시아어의 특징: 러시아어의 무성 파열음(/p/, /t/, /k/)은 영어처럼 강한 기식(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이 섞이지 않는다. 한국어의 'ㅋ'보다는 오히려 'ㄲ'에 가까운 단단한 소리가 난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 제4항은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 귀에 들리기는 '블로끄'나 '보드까'처럼 들릴지라도, 규정상으로는 '블로크', '보드카'로 적어야 한다.

*현지 발음 vs 규정의 충돌: 러시아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현지 발음에 가까운 'ㄲ, ㄸ, ㅃ' 표기를 선호하고, 공식 문헌은 규정을 따르다 보니 두 표기가 공존하게 되었다.

2. 연음(Soft Consonant)과 모음의 결합

러시아어에는 자음을 부드럽게 발음하는 '연음(Palatalization)' 체계가 발달했다. 이것이 뒤따르는 모음과 결합할 때 한국어로 옮기기 매우 까다로워진다.

*예시 (도스토옙스키): 과거에는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많이 적었으나, 현재 표준 표기법은 '도스토옙스키'다. 러시아어 모음 'е'가 자음 뒤에 올 때 발생하는 미묘한 반모음 성질을 어떻게 반영하느냐에 따라 표기가 갈리는 것이다.

*격변하는 표기 규정: 과거 일본식 표기나 영어식 중계 표기의 영향이 남아 있다가, 현대에 들어 러시아어 원음 중심의 표기법이 정립되면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표기 습관이 충돌하고 있다.

3. 어말(語末) 자음의 무성음화 현상

러시아어는 단어의 맨 끝에 오는 유성음이 무성음으로 바뀌어 발음되는 특징이 있다.

*예시 (로마노프): 성씨인 'Romanov'의 마지막 철자는 'v(브)'지만, 실제 발음은 무성음인 'f(프)'로 끝난다.

이를 철자대로 적을 것인가(로마노브), 실제 들리는 발음대로 적을 것인가(로마노프)에 대한 논의가 과거부터 이어져 왔으며, 현재는 발음을 중시하여 '로마노프'로 표기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오래된 책이나 자료에는 여전히 '브'로 표기된 경우가 많아 혼란을 가중시킨다.

[註] 언어학에서 유성음(Voiced sound)과 무성음(Voiceless sound)을 가르는 핵심 기준은 바로 목 속에 있는 '성대(Vocal cords)의 떨림'이다.
[물리적인 차이: 성대의 진동]
우리 목 안에는 '성대'라는 두 줄기 근육이 있다. 공기가 이 사이를 지나갈 때 성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결정된다.
*유성음 (有聲音, 목청소리): 폐에서 나오는 공기가 성대를 팽팽하게 긴장시켜 파르르 떨리게 만들며 나오는 소리다.
*무성음 (無聲音, 안울림소리): 성대를 벌려 공기가 아무런 저항이나 떨림 없이 그대로 통과하며 나오는 소리다.
[직접 확인해 보는 방법]
목의 울대뼈 근처에 손가락 두 개를 가볍게 대본다.
-"아~" 하고 소리 내면 목이 떨린다. 이것이 유성음이다.
-"스~" 혹은 "흐~"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고, 목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무성음이다.
요약 및 결론

러시아어 표기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귀에 들리는 된소리 현상"과 "된소리를 적지 말라는 한글 표기법 규정"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여기에 과거의 관용적 표기와 현대의 원칙 중심 표기가 섞여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 더해진 결과다.

현재로서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이 가장 권위 있는 기준이므로, 공식적인 작문에서는 '블로크'와 같이 격음(ㅋ, ㅌ, ㅍ)으로 적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러한 혼란은 철자(Spelling) 중심의 표기를 중시할 것인가, 실제 들리는 소리(Phonetics) 중심의 표기를 할 것인가의 가치관 차이에서 발생한다. 현재 한국의 공식 원칙은 "철자를 존중하되 된소리는 피한다"는 입장이어서, 실제 원어민의 발음과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알렉산드르 블로끄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우리 모두를 숨어 살피는 우연.

우리 위에는 피할 수 없는 어스름,

혹은 신의 얼굴의 광명.

그러나 그대 예술가여, 굳게 믿을지어다

시작과 끝의 존재를, 그대는 알지어다

천국과 지옥이 어디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지를.

그대는 침착한 잣대로

-보이는 모든 것을 헤아려야 한다.

우연한 윤곽들을 지우라―

그러면 알게 되리니,

세계는 아름답다는 것을.

어디가 빛인지 알지어다.

그러면 어디가 어둠인지 알 게 되리니.

세상과 신성과 세사의 죄악,

그 모든 것이 천천히 지나가게 하라,

영혼의 열기와 이성의 한기를.


Aleksandr Blok

[詩評]

우연의 심연을 건너 질서의 영토로:
알렉산드르 블로끄의 예술론

러시아 상징주의의 정점이자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블로끄(Aleksandr Blok)에게 세계는 언제나 거대한 폭풍이자 읽어내야 할 암호였다. 제시된 시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그가 추구했던 예술적 형이상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 시는 삶이라는 비결정적인 카오스 속에서 예술가가 도달해야 할 인식의 층위가 어디인지를 엄격하면서도 숭고한 어조로 설파한다.

1. 우연이라는 미로와 예술적 필연성

시의 서두에서 블로끄는 삶을 "시작도 끝도 없다"고 규정한다. 이는 선형적인 기독교적 시간관을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를 "우연"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내던져진 무력한 존재로 상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스름'과 '광명'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초월적 운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블로끄는 곧바로 예술가에게 준엄한 명령을 내린다. 일반인들이 우연 속에 함몰되어 방황할 때, 예술가만은 "시작과 끝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작과 끝'은 물리적 시간의 마디가 아니라, 예술적 완결성과 세계의 내적 질서를 의미한다. 즉, 예술가란 흩어진 삶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유기적인 우주(Cosmos)를 재구성하는 자여야 함을 강조한다.

2. '우연한 윤곽'을 지우는 행위: 현상에서 본질로

이 시에서 가장 빛나는 통찰은 "우연한 윤곽들을 지우라"는 대목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수많은 비본질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블로끄는 이러한 표상(Phenomena)들을 걷어낼 때 비로소 "세계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낙관적인 미학이 아니다. 고통과 죄악조차도 세계의 거대한 조화 속에서 제 자리를 찾고 있음을 발견하는 '인식의 미학'이다. 예술가는 "침착한 잣대"를 지녀야 한다. 감정의 과잉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관찰자이자 측정자로서 세계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빛이 어디인지 알 때 어둠의 실체도 비로소 명확해진다는 이원론적 통찰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임을 역설한다.

3. 영혼의 열기와 이성의 한기: 모순의 공존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예술가가 견뎌야 할 내면의 풍경을 묘사한다. "영혼의 열기"와 "이성의 한기"는 예술 창작의 두 기둥이다. 열기 없는 이성은 죽은 기교에 불과하며, 한기 없는 열기는 형체 없는 비명에 그친다. 블로끄는 이 두 극단의 감각이 자신을 "천천히 지나가게 하라"라고 권고한다.

이 '통과'의 과정은 예술가가 세계의 고통과 신성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내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정제된 언어로 승화시켜야 함을 뜻한다. 세상의 죄악과 신성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영혼의 광활함, 그것이 블로끄가 꿈꾸었던 '예술가의 초상'이다.

4. [결론] 혼돈의 시대에 던지는 예술적 구원

이 시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혁명의 전조와 몰락의 징후가 가득했던 시대에 블로끄는 예술을 통해 구원을 갈구했다. 그에게 예술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가장 깊은 심연까지 내려가 그곳에 숨겨진 빛의 근원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이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우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그 소용돌이 속에서 '침착한 잣대'를 들고 세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증언할 것인가. 삶에 시작과 끝이 없다는 절망적 전제를 예술적 신념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블로끄가 제시한 인간의 위대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