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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16. 2023

제주는 ‘6·18의거’를 기억하라!

2019년 5월 19일 한라일보 <김양훈의 한라시론>

22살 꽃다운 나이에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제주4·3이 발발하고 두 달 반이 지난 1948년 6월 18일 새벽, 문상길 중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제9연대장 박진경을 사살하였다. 목숨을 건 거사의 목적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민족반역자의 처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허수아비 하나를 쓰러뜨렸을 뿐 불의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집행한 제1호 사형수로 총살되었다.      


1948년 5월 5일 제주시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린 극비 최고수뇌회의 중, 선무공작을 벌이며 무장대사령관 김달삼과 ‘4·28 평화협상’을 성사시킨 김익렬 제9연대장은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육탄전을 벌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곧바로 해임을 당하고 후임으로 박진경 대령이 부임하였다. 박진경 대령은 연대장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천명하였다.      

제주4.3 당시 육군 9연대장을 맡은 박진경 대령(사진 맨 오른쪽)

1948년 6월 17일, 무자비한 진압 공적으로 대령으로 진급한 박진경 연대장을 축하해주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미군정장관 딘 장군은 삼성혈 인근의 요정 옥성정(玉成亭)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축하연에서 만취한 박진경은 밤늦게 연대본부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 3시경, 그의 숙소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문상길 중위로부터 명령을 받은 손선호 하사는 카빈 소총으로 박진경 대령의 머리와 심장을 향해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1948년 8월 12일, 재판과정 내내 박진경을 ‘민족반역자’로 부르던 3중대장 문상길 중위는 이날 최후진술에서 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의 최후진술 일부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 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박진경을 직접 사살한 손선호 하사는 박진경 연대장의 무자비한 공격작전과 처참한 목격담을 설명한 뒤 최후진술을 마쳤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1948년 8월 14일, 고등군법재판은 문상길 중위, 신상우 1등 상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4명에 대하여 총살을 언도하였다. 모두 20대 초반의 기독교인이었다. 1948년 9월 23일 수색에서 집행한 총살형에 앞서 문상길 중위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는 30만 도민과 군경원호회의 이름으로 세운 박진경 대령 추도비가 있다. 비문에 쓰인 글이다. ‘제주도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시다가 불행히도 1948년 6월 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역사를 왜곡하는 추도비는 철거해야 마땅하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박진경은 1920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친일단체인 대정익찬회 간부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진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여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에서 공부하였다. 태평양 전쟁 때에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에서 일본군 38군단 소속으로 복무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대학에서 영어과를 졸업한 경력을 살려 조선경비대에서 활동하여 미군정의 호감을 샀다. 그리하여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국장과 11연대장 등을 거쳤다.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 타이세이요쿠산카이)는 1940년 10월 12일부터 1945년 6월 13일까지 존재하였던 일본제국의 관제 국민통합 단일기구이다. 1940년 무렵부터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를 중심으로 거국정치 체제를 목표로 한 신체제운동(新體制運動)이 계획되고 있었다. 1940년 7월 22일 제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하자, 각 정당들이 해체되어 무정당 시대를 맞게되었다. 그 결과 10월에 군부·관료·정당·우익 등을 망라한 대정익찬회를 결성하게 된다. 본래 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정치력을 결집하여 고도의 국방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지만, 경제신체제안을 작성한 관료가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신체제운동은 정신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군부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정익찬회는 행정보조기관으로 전락함과 동시에 일본 파시즘은 실질적으론 끝이 난다.

대정익찬회에서 '대정(大政)'은 천하국가의 정치, "천황 폐하가 몸소 베푸는 정치"를 의미하는 미칭(美稱)이며, '익찬(翼賛)'은 힘을 보태어 거듦을 이르는 말이다. -위키백과

1948년 5월 6일 제주 4.3 사건 당시 김익렬의 뒤를 이어 조선경비대 제9연대장이 되었다.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과 선무공작을 중시하던 김익렬과 달리 박진경은 강경한 진압작전을 펼쳐 제주도민 수천여 명을 무차별 체포하였다. 이로 인해 1948년 6월 1일 대령으로 재빠르게 승진한다. 하지만 6월 18일, 승진축하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는 도중 새벽 3시 15분경 부하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총 2발을 맞고 암살됐다. 그의 장례식은 육군장 제1호로 치뤄졌다.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었다. 당장 제주도에서는 충혼묘지에 그의 추도비가 1952년 세워졌고, 남해군 군민공원에는 1990년 그의 동상까지 세워졌다. 특히 그의 고향인 남해에서는 그의 양자인 국회의원 박익주의 영향력까지 겹치며 '창군 영웅'으로까지 여겨졌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 작전이 정말로 4.3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냐부터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남해에서는 2005년에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일었으나 동상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7년에는 창원시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 대표로 올라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편 연구가 박명림은 그의 토벌작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박진경은 이러한 무차별 체포 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들을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 <출처: 나무위키>


「‘4·3 학살 주도’ 박진경 추도비 바르게 알리자」 청원 통과

제주도의회 제415회 임시회 '올바른 안내판 설치 청원' 채택

2023년 4월 21일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제주4·3 당시 강경 진압 작전을 펼쳐 학살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박진경 대령 추도비에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될지 주목된다.     

철창 조형물에 갇힌 박진경 추도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제주도의회는 21일 오후 제415회 임시회 본회의를 열어 제주4·3연구소 등 30개 시민단체가 제출한 '박진경 대령 추도비 올바른 4·3 안내판 설치에 대한 청원'을 가결, 채택했다.     


박진경은 1948년 5월 당시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도민들을 무차별 진압했으며,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임 한 달여 만인 1948년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진경 추도비는 1952년 당시 도내 기관장 등이 관덕정 경찰국 청사 내에 세워졌으며, 이후 제주시 충혼묘지로 옮겨졌다가 다시 제주국립호국원이 개원하면서 한울누리공원 인근 도로변으로 이전됐다.     


4·3 관련 단체는 지난해 3월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추도비를 철창에 가둔다"며 '역사의 감옥에 가두다'라는 제목의 감옥 형태 조형물을 추도비에 설치했다.     


하지만 이 철창 조형물은 '정당한 사유 없이 공유재산 부지에 불법 시설물을 설치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보훈청에 의해 강제철거돼 논란이 일었다.    

 

이번에 청원을 요청한 시민단체는 "4·3 당시 강경 진압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박진경 대령을 추도하는 비석이 설치돼 있는 것은 역사의 후퇴"라며 다음 세대가 4·3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객관적 사실을 담은 4·3 안내판 설치를 요청했다.     


올바른 4·3 안내판 설치 청원이 제주도의회를 통과함에 따라 도의회는 청원에 대한 의견서를 오영훈 제주도지사에 전달할 예정이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30개 단체는 공동 논평을 통해 4·3 안내판 정비 계획을 오영훈 도정이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청원에 대해 제주도 보훈청은 4·3 유족회 등 관계기관과 논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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